사이버작가

이슈토론
물고기 우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1,631

양양 오일장


BY 바다새 2009-03-20

 

                  양양 오일장


 

 


아침식탁을 물리려는데 남편의 말 한마디에 심사가 뒤틀린다. 출근 전이라 언성높이고 싶지 않아 참아보려니 부아가 치밀었다.

이럴 땐 피하는 게 상책이다. 안방화장실 세면대 물을 세차게 틀어놓고 씻는 척 했다.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잘 다녀오라는 말도 접어버렸다.

참았던 속말을 비 맞은 중마냥 중얼거렸다. 남편의 뒤통수가 꽤나 따가웠으리라. 설거지그릇 쏟아내는 소리에 감정을 실어 봐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  

때마침 달력을 보니 양양장날이다. 에라! 장구경이나 가자.


아들 녀석을 학교에 내려놓고 장터로 내달렸다. 자동차로 이십 여분 거리다.

저만치 차일을 치고 있는 몇몇 장꾼들이 보인다. 부려놓은 짐을 풀어헤치거나 진열대위에 보기 좋게 올리는 이들도 있다.

이른 시간에 도착한 모양이다. 북적대는 사람들 무리는 없으나 신선한 물건을 고르기엔 안성맞춤이다. 파는 입장에서도 마수걸이라며 덤을 얹어주거나 싼값에 넘기기도 한다.


나는 가끔 양양 오일장에 온다.

마땅히 살 물건이 있어 계획하고 오는 일은 거의 없다. 오늘처럼 화딱지가 날 때나 가슴이 먹먹해질 때도 불쑥 장터를 찾는다. 동네 아낙들을 대동하고 떼 지어 오지 않는다. 혼자 터벅거리며 구석구석을 후비고 다닌다.


여전히 은행 앞엔 이동화원이다. 이름도 가물가물한 꽃이며 묘목들이 즐비하게 놓여있다. 앙증맞은 선인장에 핀 꽃이 곱다.

현금인출기에서 꺼낸 지폐로 지갑을 두둑이 배불리고 오랜만에 나선 장터 나들이를 즐기기 시작했다. 무수한 얘깃거리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난전이다. 상인들끼리 주고받는 말마다 거친 입담에 구수한 너털웃음까지 적당히 버무려진다.

“이런, 우라질! 요것이 무엇이여?”

“아이고, 지랄육갑을 떨고 있네 그려!”

은행 앞 계단을 내려서려는데 가물치아줌마네 미꾸라지들이 시멘트바닥에 쏟아져 그야말로 지랄육갑을 떨고 있는 거다.

주워 담느라 애쓰는 모습에 웃음을 참고 지켜봤다. 몇 마리는 그 와중에 꼬물거리며 맨홀 근처로 탈출을 시도한다.


엊그제 저녁 딸아이의 묵밥이 먹고 싶다는 말이 떠오른다.

가만있자! 묵집 아줌마가 어디 있더라?

도토리묵, 메밀묵, 손 두부 한모까지 아슬아슬 깨지기 쉬운 물건들을 챙긴다.

정성껏 종이상자에 담아 노끈으로 묶어주니 고맙기만 하다.

오백 원짜리 양말도 아홉 개나 샀다. 아예 한 켤레를 골라 오천 원을 채웠다. 요즘 인기 있는 남자가수 얼굴이 그려진 양말이다. 딸아이가 비명 지르며 좋아하는 가수양말로 두어 켤레 더 담았다.     


정말이지 장구경은 끝이 없거니와 살맛난다.

아침나절 분통터졌던 일이 뭐였는지 까맣게 잊어가고 있으니.


나물 몇 가지 사볼 요량으로 다른 골목으로 들어선다.

양양장터에서 가장 사람냄새 짙은 곳이기도 하다. 투박한 손길 내 어머니쯤 연세의 할머니들이 길바닥에 펼쳐놓은 푸성귀며 곡식들.

원래 고른 양보다 덤이 더 많아지며 인심도 넉넉하다.

달래, 냉이, 원추리, 돌미나리, 머위 순 등등. 봄나물이 지천이다.

몇 천 원 어치 나물을 골랐다. 사들고 보니, 이런! 죄다 남편 양반 좋아하는 것뿐이다. 별수 없는 여편네가 바로 나로구나. 속으로 혀를 끌끌 찬다.


어물전을 돌아 나오려는데, 반가운 얼굴이 보인다. 

쪽머리 할머니다. 온갖 씨앗이며 참빗, 바가지, 속 고쟁이 고무줄까지 파는 할머니가 제자리에 있다. 장날마다 와도 오래도록 빈자리였다.

주름 깊고 백발성성하여 내심 노환이 걱정되었는데, 버젓이 내 앞에 계시다.

마치 독립운동 하는 동지를 만주벌판에서 만나기라도 한 듯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할머니! 댁이 어디세요? 왜 한동안 안보이셨어요?”

가는귀가 먹어 쉽게 알아듣지 못하는지 되묻기만 한다.

무명실 한 타래를 샀다. 이불호청 갈아 꿰맬 일도 없건만 뭐라도 집어 들고 싶었다.

어쩌면 아침나절 언짢게 보낸 남편과 마주앉아 타래 풀며 실패에 감아보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주섬주섬 사 모으다보니 어느새 장 보퉁이가 불룩하다.

싸구려 티셔츠 몇 장 들춰본다. 하나에 삼천 원 두 장이면 오천 원  내란다. 석장 챙기며 얼마에 해 줄 거냐 물었다. 마수걸이란다.

“칠 천 원만 주쇼!”한다.

\'내 팔자에 명품 옷이 뭔 소용이냐. 값싼 옷 걸쳐도 명품인간 되면 그만이지\'

헌데, 주문 외워 봐도 나는 애초에 명품 성 인간되긴 글렀다.

자가진단 해본 결과 그렇다는 얘기다.


잡곡 서 너 가지 보태고 나니 이젠 무거워 못 들겠다.

장터출구도착. 떡 마을에서 빚어온 인절미와 계피 떡 두 뭉치 샀다. 도대체 돈을 얼마나 풀어 쓴 것이냐. 대책 없는 주먹구구식 가정주부다.

그러면 어떠랴. 장터 한 바퀴 돌고나니 산뜻해진 기분이라니.

자동차 트렁크에 봇짐을 쑤셔 넣고 낙산콘도까지 이어진 해안도로를 달렸다.

곧 벚꽃이 흩날리겠다. 나무들마다 꽃눈이 도드라져 있다.


속도감을 잊은 채 천천히 달리는 차안으로 저녁그림이 펼쳐진다.

도토리묵밥을 먹으며 재잘거릴 딸아이, 차진인절미 쫄깃 거리며 웃어 댈 아들 녀석, 봄 냄새 섞어 무친 나물에 밥그릇 비워놓을 남편.

씩씩대며 달려 나왔지만 결국 보금자리 안으로 줄달음을 치고 있군.

명품이 따로 있겠는가. 만족하며 살면 명품인간인 게지.


누구든 양양오일장에 오거든, 아침나절 볼이 잔뜩 부어 돌아 댕기는 아낙을 잘 지켜보기를.

그게 바로 오일장 단골, 명품아낙이올시다.      

 

 


2009년 3월 19일 양양 오일장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