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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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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은 지고


BY 바다새 2009-03-17

 

                 목련은 지고

 

 

잊을만하면 일침을 놓는구나. 꼭 이 말은 해야겠다. 나는 네 생각만큼 속이 깊지 못하다. 어쩌면 빤한 재주로 읽는 이들의 눈요기만 되었을 게 내 글이다.

가스 불 냄비에서 삶던 행주가 시커먼 숯덩이가 되는 일이 다반사이고, 모니터 위  낡은 국어사전 껍데기엔 봄 내내 먼지가 풀풀거린다. 그런 정신으로 사는 게 나다.

이런 나에게 해마다 거르지 않고 기억 속 가물거리는 목련을 읊어주다니.

친구야! 차마 고맙단 말조차 할 수 없어 졸린 아들의 등을 긁어주다 조금 울었다.

용연향 풍기는 글을 쓰라니. 감히 나 같은 위인에게 가당치도 않은 말이다.

기대를 크게 갖는 너에 비해 한없이 쪼그라드는 자화상이 보여 나보다 밤이 먼저 울더구나.

 

 


여고단짝 친구에게서 편지가 왔다. 금세 답장을 써야했겠지만 가슴 언저리가 욱신거려와 호흡만 가다듬었다.

도대체 친구는 어느 날까지 목련이야기를 전해주려는 걸까.

가느다랗게 부여잡은 글 줄기 놓칠세라 소식을 전해온다. 느슨해진 감상을 이미 눈치 챘을 것이라 생각 했었다. 나보다 나 자신을 더 잘 아는 아이.

인천 어디쯤에 살고 있다는 것 밖에 나는 현재 그 친구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목련나무가 겨울의 찬 비듬을 채 털어내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있건만 눈을 들어 쳐다보라는 거다.

현재 내 꼴 먼저 재확인하고 정신 차리라는 뜻이렷다.

 

시골뜨기 출신인 친구와 나는 읍내 고등학교에서 만났다.

면소재지 중학교에선 제각기 공부 꽤나 했을지라도 여고교정에 뒤섞인 계집아이들 속 우리는 초라했다. 

동병상련의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문예반을 선택했기에 그러했을까. 금방 친해졌다.

굽이쳐 흐르는 남한강을 곁에 두고 그해 봄날은 초록으로 여물어 갔다.

칠판에 분필가루 꽃분처럼 날리며 시 한 편 올려놓고 감상문을 써보란다. 자그마한 키에 용수철 튀듯 통통 걷는 문예반 선생님의 숙제이다.

올망졸망 모인 문예반 전원이 일시에 시인이고 예술가이다. 갖은 똥 폼을 다잡고 눈까지 지그시 감는다.


이어지는 발표시간.

서정주님의 ‘국화 옆에서’를 읽고 썼던 감상문이었을 거다. 하여간 대단하게 갖은 양념 올려서 글을 썼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울었던 소쩍새와 간밤의 무서리까지 내렸다는 그리하여 잠도 오지 않았던 고통을 잘 아는 척 주저리주저리 적어서 발표했다.

어느 날엔 ‘문둥이’라는 시를 읽고는 ‘꽃처럼 붉은 울음’은 아닐지라도 슬쩍 눈물 났었다. 보리밭에 달뜨기를 기다려 애기하나 먹고 울었다지 않은가. 내가 꼭 해와 하늘빛이 서러웠다던 문둥이가 된 듯해서 또 슬퍼졌다.

선생님의 칭찬일색의 평이 이어진다. 그저 솔직하게 일기마냥 펼쳤다가 사람들 앞에 읽어주었을 뿐인데 당장 뭐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문예반을 들락거리던 그해 사월. 친구와 내가 열일곱 먹고 잔디밭에서 팔랑거리던 때였다.

무르익은 봄은 점차 제 빛을 더해가고 나무며 꽃들이 부끄럼도 잊고 여린 속살을 마구 드러내던 날들이었다.

교정 앞 뽀얗게 터뜨린 백목련의 자태가 일품이었다. 오며가며 시를 짓고 산문을 엮어 내리느라 목이 부러져라 올려다보곤 했다.

갑자기 폭설이 쏟아졌다. 산간지방도 아닌 지역인지라 놀랍기도 했다.

다른 아이들은 내리는 눈발을 따라 들뛰고 자빠지느라 정신없이 즐거울 판에 훌쩍거리던 계집아이가 나였다. 아마 친구도 울었을까.

목련이 떠올라 눈물 흘렸다. 꽃잎 사이사이 얼음 배길까봐 내 가슴이 먼저 아리고 시려와 울었다.

지금은 시멘트 대리석보다 더 차갑고 둔탁한 내 감성이 열일곱 한날엔 목련자태 스러질까 울기도 하였다면 누가 믿을까. 


무디어진 감상을 끌어안고 나는 시집가고 그 아이도 아낙이 되었지.

얼굴본지 십 여 년도 넘었건만 해마다 봄만 되면 가슴속에서 다 짓뭉개진 목련을 외친다.

꽃향기는 고사하고 곰팡내 풍기고 있느라 늘어져 있는데 향유고래가 품어대는 용연향을 내보란다. 참으로 가랑이 찢어질 일이로다.

가슴에 상처 난 고래가 스스로 그곳을 치유하기 위해 흘린 액체가 고여 향이 된다는 용연향.

친구는 아직도 내게 기대와 꿈을 걸어두고 사는가보다.

아직 내 인생은 더 아파야하고 고통 받아야 하는가. 내면을 치유하기 위한 몸부림의 글들이 고여 향을 품어대려면 말이다.


 

친구야!

너는 목련을 보면 내 생각이 나는 모양이구나.

난....., 네 편지를 받으면 목련이 떠오른다.

그해 사월 내리는 눈발을 벌어진 꽃잎사이 묻어두고 서걱서걱 얼어가던.


내속에 하얀 목련은 벌써지고, 해마다 봄이면 너 하나만 그득히 피어난다. 




2009년 3월 16일 밤에 여고단짝 친구 편지를 받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