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겨울날, 골목길에서
어느 지방에는 폭설이 내려 이글루같은 눈의 동굴까지 만들어가며 아이와 놀았다는 글을 읽고 문득 떠오르는 지난 날의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은 떠올리면 달콤하기도 하고 쌉싸름하기도 하고 명치께가 아리기도 해서 의식적으로 피해오던 기억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그러니까 내 나이 열두 살 때. 막 초경을 치루었던 그 때...
학교에서는 산수경시대회 학교대표를 뽑기 위해 잦은 산수 시험을 보곤 했다. 그런 과정 끝에 우리 5학년 학년 대표로 상위 1등에서 4등까지 네 명의 학생들이 발탁되었다. 세 명의 남학생들과 홍일점 한 명의 여학생이 발탁되었는데... 그 홍일점이 바로 나였다. 발탁된 우리 네 명은 방과 후에 학교 뒤에 있었던 교사 관사에 있는 우리 담임쌤의 관사에서 별도의 산수경시지도를 받게 되었다. 자연히 깜깜한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향하게 되곤 했는데...
학교는 광업소가 있는 그 지역 맨 꼭대기 부락에 위치해 있었고 우리집은 그 부락의 가장 맨 아랫마을에 있었기에, 족히 2.4킬로미터는 걸어야 우리집에 당도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런 거리를 밤 10시가 넘어서 걷기 시작하면 40분은 걸려야 집에 도착하기 일쑤였고 열두 살 초딩에겐 버겁고 무서운 거리였다. 그 때 왜 나에게 차비가 없었는지는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때 우리집은 그 지역에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있는 ‘*룡사’라는 절에 다니고 있었는데, 언니와 나는 그 절의 불교 학생회 회원이었다. 그 당시 그 절은 기독교 청년학생회가 활발히 활동을 하듯, 불교학생회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는 사찰이었고 중딩이었던 언니, 초딩이었던 나도 일주일에 한 번씩 그 절에 가서 학생회 활동에 참여하곤 했었다. 그 절에는 풍금도 갖춰져 있었고 외부강사까지 영입해 불교 학생회 합창단까지 운영하고 있는 꽤 알찬 학생회 활동을 지원하고 있는 절이기도 했다.
신도들의 자제들 위주로 구성된 학생회여서 그랬는지 학생들의 연령층도 다양했다. 고등부가 특히 활성화되어 있어서 매년 사월초파일에 고등부 언니들이 여승들처럼 고깔을 쓰고 하이얀 한복을 입고 선보였던 바라춤은 참으로 볼만 했었던 기억이 있다.
하여간 그 학생회 고등부 오빠들 중에 한 오빠가 나의 그러저러한 딱한 사정을 알고 집이 학교와 우리집 중간치에 있는 아우라지에 있었던 그 오빠가 깜깜한 밤에 무서우면 자기네 집 앞에 와서 자신을 부르라고 했다. 그러면 자전거를 태워 집까지 데려다 주겠노라고...
그 날도 밤 열 시가 넘어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는데...때는 12월 초순,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고... 쌀가루같은 싸락눈이 폴폴 내려앉기 시작한다. 아우라지 연탄 공장께에 오니 상가의 불빛은 이제 모두 사라져 깜깜한 어둠의 긴 터널만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잔뜩 움츠리고 될 수 있으면 오른쪽 산을 쳐다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게걸음으로 아우라지 중턱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 곳엔 대낮에도 피하고 싶은, 죽은 고목 나무가 귀신처럼 도사리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여름에도 싹이 나지 않는 거대하고 시커먼 고목... 아마, 지금도 그 고목은 그 곳에 그 자리에 서 있을 것이다...
그렇게 어깨에 자라처럼 목을 쑤셔박고 게걸음으로 겨우 아우라지 중간치에 다다르자, 불현듯 그 오빠와의 약속이 생각났다. 그래서 나는 그 오빠가 일러주었던 그 골목 어귀로 조심스럽게 발을 옮겨놓았다.
그 집 앞...
나는 그 오빠네 집의 철담장 앞에서 서성이면서도 차마 오빠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 눈은 자꾸만 내려쌓이고 발가락이 시려오고 내 마음은 초조해져 가고, 가로등 불빛의 실루엣을 타고 싸락눈은 자꾸만 더 굵어져 가고...
그렇게...반 시간은 흘러갔을 즈음... 갑자기 그 집의 철제 대문이 삐그덕... 열리고 오빠의 자전거가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오빠다! 나는 내 신발코를 눈 내린 언 땅에 비벼대며 차마 오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 오빠가 무심히, 그리고 아주 장난스럽게 말했다.
<임마, 왔으면 날 불러야지... 이러고 밤 샐려 했냐? 어쩐지 이상하더라니... 이상해서 한 번 마당에 나왔다가 울타리 틈새로 널 봤지...어? 근데 너 옷이 그렇게 얇아서 어떡허냐?>
하더니, 오빠는 자신의 외투를 벗어 나에게 입혀준다. 내 어깨에 걸려있던 책가방을 풀어 자전거 뒷꽁무니에 매달고 나를 자전거 뒷자리에 태우고 조심스럽게 페달을 밟는다. 꼴에 내외하느라고 오빠의 허리를 잡지 못하고 오빠의 윗도리 옷끝만 살짝 붙잡고 있었더니, 어느 새 오빠의 억센 손이 뒤로 휙 오더니 내 두 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허리를 껴안다시피 꽉 붙잡도록 붙잡아맨다.
눈은 내려 쌓이고 또 쌓이고 하얀 눈길 위에 우리가 지나간 자전거의 가느다란 두 바퀴 자국이 선명하고 오빠의 허리를 껴안다시피 꼭 붙잡은 채 자전거 뒷자리에 엉거주춤 앉아 자못 떨리는 마음 가눌 길 없었던 열두 살 소녀의 가슴은 콩닥이고....
지금도 함박눈 오는 밤이면 그 겨울밤의 풍경이 어제의 일인 양 되살아난다.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