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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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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장 김문자


BY 바다새 2008-12-19

 

         반장 김문자


 


행여 글의 제목만을 보고 위인인 백범 김구 또는 도산 안창호의 분위기를 기대하고 읽는 이가 없었으면 좋겠다. 의적 홍길동 같은 인물의 이야기는 더더욱 아님을 미리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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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냐고 연거푸 묻기만 했다.

액정화면에 찍힌 수신번호는 낯설었고 목소리조차 기억에 없었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궁금해 하던 순간 갑자기 전화기 너머 여자의 목소리가 까르르 웃음으로 변한다.

“나 모르겠냐? 네 여고동창 김문자!”

맞다. 나에게도 여고시절이 있었다.

거의 스무 해 만에 대뜸 전화를 해서 아주 당당하게 자기이름 석자를 외치는 여자 그녀가 바로 정의의 반장 김문자다.

긴 세월의 징검다리를 그렇게 많이 건너뛰었음에도 어제 본 듯 어색함이 없다.

다짜고짜 말 뒤 꼭지마다 척척 붙여주는 욕설에 오히려 고마움의 눈물이 잦아드는 것은 왜일까.

단 한마디의 카랑카랑한 음성에 송두리째 잃어버렸던 시간의 틈 속으로 들어가게 할 만큼 그녀는 아직도 저력 있는 반장이었다.


우리네 어머니들 이름인 순자, 영자에서나 따왔을 촌스러움이 덕지덕지 붙은 김문자.

그녀는 삼 년 내내 반장만 해먹었다.

뭐 특별히 예쁘게 생기지도 않았고 돈 많은 집 외동딸도 아니다. 옷차림새도 세련미하고는 담을 쌓았는지 유행과 상표는 철저히 무시하고 다녔다.

훤칠하게 키라도 크다면 힘으로 제압한다 하겠지만 작달막한 키에 살이 찐 것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언뜻 보기에 일등 반장 감은 아니었다.

당시 상위권 성적을 자랑하는 계집애들이 한 과목당 여러 출판사의 참고서를 구비하고 다녔는데, 반장 김문자는 달랑 교과서만 들고서도 일등을 식은 죽 먹기로 했다.

아이들은 김문자 보다 반장이라는 호칭으로 더 많이 불렀다.


김문자의 엉성함은 말솜씨에서도 드러났다.

강단 있는 리더십으로 대중을 압도하기는커녕 반장이 한마디 하면 분단사이마다 시장바닥처럼 웅성거린다.

전달사항이 있어 교탁 앞에 서서 외치는 자세를 볼라치면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는 새색시 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장난기 심한 아이들의 함성은 계속 커진다. 그러나 우리의 반장은 자신이 하는 말에조차 키득거리며 웃을지라도 절대 기죽지 않는다.

끝까지 할 말은 다 마치고 내려온다. 듣고 있던 아이들이 책상을 내리치며 박장대소라도 하면 더욱 의연하게 버티며 여유 있는 농담한마디까지 던진다.

솔직히 나는 반장과 어울릴 만큼 학업성적이 우수하지도 품행이 방정 한 것도 아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폼 잡는 데만 일가견이 있었다. 매번 시행하던 모의고사시간에 대충 적어내고 책상 위에 시집이나 철학 책을 올려놓고 읽던 괴짜였다.

인생이 어떠하고 행복과 사랑은 저러하다며 궤변을 늘어놓았다. 엉터리 이론가임에도 따돌림을 주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그나마 학급의 명성을 높이는데 일조를 했기 때문이리라. 교내 백일장 따위에서 가끔 상을 타서 안겨주니 밉살맞으나 봐주자는 식이었겠지.


다시 김문자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나와는 하늘과 땅쯤으로 신분차이(?)가 격심했건만 어찌 오늘날 전화번호를 묻고 물어 연락을 해 왔을까하는 것이 의문이다.         

꼭 나만큼 불어났을 그녀의 나이와 겉모양을 어림짐작해 보느라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

딸만 여럿이던 자매 중 맏이였고 홀어머니를 모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소박하다 못해 남루한 옷차림이 오히려 그녀의 상위권 성적을 몇 배나 빛나게 해주었다.

소시지에 계란말이 싸오는 읍내 계집아이들 틈에서 버젓이 멸치볶음이나 김치를 꺼내놓고 먹을 용기가 사실 나에게는 없었다.

끼리끼리 모인다고 반찬의 급수가 같은 애들이 모여 앉아 점심을 먹었다. 김문자의 반찬이 나와 같은 단계의 콩자반이나 장아찌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 얼마나 깊은 동지애를 느꼈던가.

해외에서 외롭게 살다가 같은 동포를 만나 김치냄새 감격스럽게 맡는 기쁨이라고나 할까.


김문자는 단순한 반장이 아니었다. 진정한 서민의 아픔을 피부 깊숙이 경험한 지도자인 것이다. 유명상표로 머리끝부터 발바닥까지 도배를 하고 다녔던 몇몇 부르주아의 대표적 인물들하고는 사고방식이 달랐다.

너그러운 품성으로 친구를 싸안을 줄 알았다. 문제가 발생되어도 조급함 없는 표정으로 의견을 물어왔다.

민주주의의 참 실천자였던 것이다.

이쯤 되면 혹시 내가 반장 김문자의 졸개라도 되어 받아먹은 콩고물이 있는지 의구심을 품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우선 학업성적에부터 그녀와 나는 같은 부류에 섞일 수가 없었다. 겨우 이름정도 외우는 사이였다고 할까. 

       

학부모 상담이 있었던 날.

한번은 김문자의 어머니가 학교에 오셨다. 소위 반장어머니쯤 되면 대단한 계급까지는 아니어도 대충 목에 깁스를 하거나 치마를 펄럭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역시 우리의 김문자 어머니는 달랐다. 선생님을 향해 다소곳이 인사를 하며 어쩔 줄 몰라 하시는 태도에서 저절로 존경심이 우러나왔다.

들릴 듯 말 듯 차분한 목소리로 몇 마디 하시다 가는 뒷모습은 지금껏 보아왔던 반장의 어머니들과 상당한 비교가 되었다. 그 어머니의 그 딸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어려운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여유 있는 웃음으로 한결같은 표정 지었던 반장 김문자와 어머니가 닮았다.


전화기에 대고 살면서 힘들지 않았냐고 물으니 가난해서 좀 불편하단다.

그 얘길 하면서도 웃는다. 아마도 가난을 짐으로 지고 가지는 않았을 거다. 옷에 붙은 단추쯤으로 여기고 살아 갈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내가 아는 김문자이다.       


이 나이 먹도록 마을의 통장 부녀회장 한번 못해본 나에게 반장 김문자가 전화를 했다.

그것도 어쩌다보니 한 게 아닌 추적을 거듭하여 알아냈단다.

반복하는 말이 너와 나는 인연이 깊나보다 이다.

우연히 피천득의 수필집 ‘인연’을 재차 읽고 있을 때 그 전화를 받았다.

그렇다 반장!  네가 인연이라면 인연인 게지.

언제 너 만나 볼까나?


어느새 반장 김문자와 나는 추억이 지독하게 그리운 나이가 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