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819

외 할머니


BY 솔바람소리 2008-11-05

가을바람은 소리가 다르다. 을씨년스러운 울음과도 같다. 휘의잉...

성격도 다르다. 창문을 때리며 조금은 과격한 것도 같다. 덜커덩...

이 계절만 되면 난 몇 해 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 생각이 어느 때보다

간절하다. 푸짐한 욕이 그립다.

 

내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 지냈던 할머니 댁은

둘째 이모와 4째였던 우리 엄마가 장만해준 것으로

초등학교 정문과 2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초록색 양철지붕에 흙과 시멘트로 벽을

이룬 그 집은 방이 위채에 둘, 아래채에 하나가 붙어있었다.

아래채는 주로 선생님들이 하숙을 하곤 했다. 융단처럼 벽을

타고 올라가던 초록의 이끼가 인상적인 ‘펌프’ 수돗가가 있었고

마당 한가운데는 여름엔 ‘어린왕자’에 등장했던 유일한 친구로

노랗고 빨강 탐스런 꽃망울을 피우던 장미꽃들이,

가을에는 자주색의 갈기가 많은 국화꽃이 향기를 피우던 제법 큰 화단이

있었다. 그 앞으로 정사각형 모양에 50cm 높이의 제법 큰 장독대가

놓여있었다. 넝쿨 콩이 담장을 뒤덮은 그 집은 지금 생각해도 터가

넓은 곳이었다.

대문을 나와서 담장을 타고 뒤뜰로 돌아가면 비료포대를 덧대서

만든 문이 엉성한 화장실이 있었고 화장실 옆으로 아담한 텃밭도

있었다. 텃밭을 담처럼 이룬 바로 위가 마을의 동산이었다.

그 산에서 내려오는 뱀 때문에 나무 마루를 내려오며 신발을

신기전까지 늘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소금처럼 생긴

하얀 것이 곳곳에 있길래 뭐냐고 여쭈니 백반이라고 했다.

그 후로 집 안에 뱀이 들어오지 않은 것도 같다.

 

편식이 심했던 내가 냉이무침을 먹고 돌미나리무침을

좋아하게 된 대에는 외할머니의 공이 크다.

배가 아프다며 밥을 먹지 않는 손녀의 배가 차다는

이유로 겨울들판을 다니며 꽁꽁 얼어버린 땅을 파헤치고

냉이를 캐서 국도 끓여주시고 된장으로, 고추장으로 무쳐

주시기도 했다.

봄이면 산으로 산나물을 캐오셨고 늦가을이면 수확한 밭에

남아있는 달랑무와 무를 한 포대씩 담아 오셔서 겨울동안

내내 생선들을 넣고 지져 주셨다.

외할머니의 자존심은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아서 서당 한번

다닌 적 없으신 분이 오빠들 공부하는 어깨너머로 글자를

배우셨다고 했다.

간간히 일찍 세상을 뜨셨다는 할아버지가 보고 싶지 않냐는

내 질문에 “육실할 인간이 보고 싶긴 뭐가 보고 싶어.

그 인간 죽을 때 나는 눈물도 안 나오더라.“라는 변함없는

대사를 고수하셨다. 고지식한 시부모님 모시고 살며 따뜻한

밥 한번 드신 적 없다는 할머니는 옛날에 못 먹고 죽은 며느리가

‘소쩍새’가 됐다며 당신을 빗대어 말씀하셨다.

강경한 그 마음의 상처, 당시에 얼마만큼 아팠을 지를 나는 감히

짐작도 못한다....

놀고먹던 외할아버지를 대신해서 할머니는

혼자서 많은 일을 하셨다는데 출가한 딸들마다 당신처럼

고생하는 것이 가슴 아파서 4자매의 자식들인 외손자들을 손수 키워주셨다.

우습게도 2형제의 자식들인 친손자들은 일 년에 몇 번 볼 기회도

없으셨다.

 

“젠장할... 외 손주를 위하느니 방아괭이를 위하라는데 내가 무신

영광을 보겄다고 이지랄하고 사는지 모르겄다...“

할머니의 18번 대사는 손녀와 손자들이 당신이 차려준 밥상에서 신나게

밥술을 뜰 때거나 별식으로 해준 간식 앞에서 행복해 할 때였다.

당신이 뿌듯한 그 마음이 부질없음을 할머니는 벌써부터 짐작하고

계셨던 듯, 희망을 갖지 말자는 자신의 다독임이었을까...

자주 하던 그 말씀에 난 언제부턴가 그 옛날이야기가 틀린 것을

증명하고 말겠다며 큰소리를 쳤었는데... 나는 나무 방아괭이조차

드리지 못하고 말았다.

 

-옛날에 자신처럼 한 할머니가 애지중지 키웠던 외손자가

후에 크게 성공해서 보고 싶은 마음에 찾아 갔더니

하인을 시켜서 달랑 절구괭이만을 대문 밖으로 건네 주길래 집에 와서

섭섭함에 그것을 던져 버리니 나무 절구괭이가 짜개지며 금 절구괭이가

나오더란 전설의 끝을 씁쓸하게 말씀하셨다. 물질로만 보상하려던

손자의 그릇된 마음이 섭섭했음을 가르치셨다. 우리들은 그러지

말기를 바라셨을 텐데 우리는 물질커녕 못난 낯짝도

자주 봬드리지 못하고 말았으니...-

 

외손자, 손녀들을 위하는 것이 부질없음을 진작부터 아시면서도

아들들을 돌보지 못하시는 미안함을 어쩌지도 못 하시고

늘 당당함을 잃지 않으시려고 무던히도 노력하신 할머니셨다.

 

여름이면 마당에 쑥을 태워서 모기를 쫓아 주셨고 손자들이

물에 빠져 흙으로 범벅이 돼서 돌아와도 화내는 법도 없이

놀이삼아 잡아온 민물조개로 된장찌개를 끓여주시며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셨다. 흙물이 벤 옷을 손으로 몇 번씩을

문지르면서도 불평을 않으셨다.

된장을 넣고 자주 끓여 먹던 수제비가 싫다며 언젠가 드라마에서

봤던 양식이 먹고 싶다는 나를 위해 할머니는 납작한 수제비를 크게

떠서 접시 위에 올려주시며 과도와 포크를 준비해 주는 센스도

발휘하셨다.

만두가 먹고 싶다고 하면 다음날 당면을 대신해서 라면의

면발로도 끝내주는 찐만두를 만들어 주셨고 겨울이면 돼지비계로

기름을 빼서 그 기름으로 김치를 볶아 주셨고 기름 뺀 비계로는

찌개에 넣어서 쫄깃한 고기 대용으로 사용하셨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다닐 적에 선생님과 싸우고 돌아오던 날,

비가 오는데도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던 내가 해가 져서야

비에 쫄딱 젖은 모습으로 돌아와서도 부연 설명 없이 당당하게,

“할머니, 나 술 좀 사줘.”라는 버릇을 쌈 싸먹는 말을

꺼내 놔도 놀라기는커녕,

“모주 딸이 술 못 쳐 먹을라고, 그려... 먹어라. 소주 먹을래?

맥주 먹을래?“ 그러고 마셨다.

“맥주...”

내 말에 할머니는 두 말도 없이 병맥주를 3병이나 사서

상위에 땅콩과 오징어 안주까지 갖추어서 올려주시며

손수 따라주셨다.

왜 그러니, 무슨 일이냐, 묻지도 않으시고 그렇게

욕 잘하던 할머니가 묵묵하게 손녀딸의 빈 잔을 채워주셨다.

그 일을 후에 누구에게도 말씀도 않으시고 묵묵히 담고 계셨다.

 

‘육실할년... 개도 안 물어갈 인간... 니이미...쳐 죽일 것들...’

나는 그 험한 욕조차 구성지게 느끼며 자랐다.

함께 자란 3째 이모의 아들인 사촌동생의 버릇없음을 이유로 옴팡지게

대하던 나를 이유로 할머니는 내게도 그 거한 욕을 해대곤

하셨다.

 

“이 년아! 그 놈이 나한테 맞는 매가 얼만데 너까지 지랄이냐,

니 엄마가 돈 된다고 유세냐, 유세길?!!!“

녀석의 모난 행동을 감싸는 할머니에게 나 역시 지지않고

섭섭함으로 할머니가 ‘앙살’이라며 싫어하는 말대답을 늘어

놓았고 그날은 나 역시도 ‘우라질 년’이 되어버렸다.

 

이모가 재혼하며 맡긴 핏덩이를 스무 살이 넘도록 품에 끼고

살았을 그 인연을 할머니는 녀석의 어긋남에도 마다하지

않고 품에 안았다. 오히려 육체적으로 고달픈 나보다 정신적으로

상처가 컸던 녀석을 더 크게 감싸 안고서 내치시지 않으셨다.

 

할머니가 해주셨던 옛날이야기 속에 복을 받는 사람들은

늘 하나를 일려주면 둘을 알아내는 비상한 머리의 사람들이었고

부자로 행복한 삶으로 오래토록 살았다.

난 할머니의 얘기 때문에 하나를 알려주면 둘을 까먹는

내 머리가 훗날 복도 못 받는게 아닌가 걱정을 해야 했고

복 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 안달이 나기도 했었다.

우둔한 사람은 복도 못 받았던 할머니의 이상한 진리...

나는 그래서 이리 바닥을 기며 사나보다...

 

할머니가 걱정하던 절구괭이 배은망덕한 외손녀가 되지 않겠다며

세계여행을 시켜준다고 약속했던 것을 나는 끝내 지켜드리지 못했다.

고작 내가 해드린 것이 변비로 고생하는 할머니께 돌아가시는 날까지

약을 대드린 것 밖에 없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 할머니께서 내게

전화를 주셨다.

“우리 손녀 딸, 잘 있냐?”

“응, 할머니는 잘 계셨어?”

“늙은 거야 잘 있지... 신랑은 돈 잘 벌고?”

“그럼, 이 세상 돈이 다 내건데, 할머니 돈 필요해? 말만해

내가 한 트럭 보내 줄까?“

“ㅎㅎㅎ... 늙은 것이 뭔 돈이 필요해. 아픈데 없자?

핼미가 죽으면 네 아픈 것 다 싸들고 갈 거다. 손녀 덕에

핼미가 화장실도 다니고 제일 큰 효도를 하는데...“

“또또... 그런 소리 말라니까. 할머니는 150살까지 살아야 된다니까...”

“에이 이년아, 망 말을 해라...”

 

세계여행은커녕 국내 여행도 못 보내드린 손녀딸의 가슴 아픈 마음을

미리 헤아리며 고맙단 말로 마무리를 지어주셨던 할머니.

생신 상 잘 받아 드시고 외숙모들에게 미장원에 다녀 오자시며

채비를 하시다가 쓰러지셔서 바로 세상을 떠나신 할머니...

며칠 동안 눈이 끝임 없이 내리던 것이 멈추고 햇살까지 따뜻해서

내린 눈도 모두 녹아서 선산에 묻힐 때에도 장례가 수월했다며

꼬장꼬장한 성격대로 돌아가실 때에도 깨끗하게 떠나가신 할머니를

모두 ‘복 받은 양반’이라고 했다. 할머니의 손을 거쳤던 외손자, 손녀들과

그 자식들만으로 북새통을 이뤘던 장례식장에는 참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큰 동생, 작은 동생, 사촌 동생도

꿈에서 할머니를 뵈었다는데 내 꿈에는 나오지 않으셔서

투덜댔더니 며칠 후에 꿈에 나타나셔서 그 거한 욕을

푸짐하게 늘어놓으시기에 꿈에서도 나는 섭섭함에

눈물까지 쏙 뺐었는데...

이상하게 할머니는 내가 힘들 일이 있을 때마다 꿈에

나타나셨다.

그래서 차라리 꿈에 뵈지 않으셨으면 하는 바람이 되었다...

 

웃통을 벗은 모습으로 젖가슴을 내놓고 집밖을 나서는 것을 기겁하는

내가 재밌었는지 내가 학교에서 돌아 올 때를 맞춰서 대문밖에

헐렁한 몸빼 바지만 입고 축 쳐진 주름투성이 젖가슴으로 장군처럼

당당히 뒷짐지고 서계시던 모습이... 오늘은 유난히도 그립다...

할머니와 살았던 탓일까, 나는 길거리의 노인들과 목욕탕에 홀로 오시는

연세 지긋하신 분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곁에서 주절주절 떠드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분들이 정겹기까지 하다.

 

‘할머니...정말 내가 아픈 것 모두 가져간다던 그 말 거짓말 아니지?’

 

난 참 하고 싶은 말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