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마을 사는 친할머니는 첫 남편을
폐병으로 잃고 1년도 안 되서, 15살
어린 딸은 쌀 한 가마에 어느 집에
시집보내버리고 그 아래로 4형제는
남의집살이로 보내셨단다.
그때 둘째였던 내 아버지 나이가 7살 때였단다.
-그런 어린애를 일 부려먹기 위해 받아 준 곳이
있었다는 것도 그렇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코흘리개 어린 자식들을 그렇게 일찌감치
세상 밖으로 내 몰던 내 할머니의 사고도...
엄마와 외할머니의 사랑 속에 자랐던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식들에게 일찍이 자립심을 키워주셨던 친할머니는
갓 스물이 된 아들과 열 여덟살 며느리의 지척에서
자식들이 벌어다 준 돈으로 시작한 순대국밥 집을
제법 괜찮은 벌이로 살고 있었다고 했다.
자식에게는 정을 못 느끼셨던 분이 외간남자들에게
쏟아 부을 사랑은 넘쳤었는지, 이 남자 저 남자
품에서 전전하다가 겨우 한 남자를 만나서 재가
했을 당시이기도 했단다.
-그런데 첫 남편을 폐병으로 일찍이 저세상으로
보낸 분이 나이팅게일의 희생정신을 소유했는지
폐병을 앓는 남자를 두 번째 남편으로 받아들이셨다니
그 삶도 참 박복한 삶이었을 것이다.-
멀쩡히 재가해서 아들까지 낳고 살던 할머니는
굶주리는 아들 며느리에게 시다만 김치쪼가리
한번 준 적이 없었단다. 곁에 살기에 한번 씩
내 부모님이 들를라치면 내 아버지의 새아버지가
비단이불 덮고 있던 가게 방 아랫목에서 뭣하러
왔나하고 눈을 흘겼고 그 곁에 앉아있던 할머니의
눈초리 역시 그 사이에서 낳은 9살짜리 아들을
안고서 겨울에 이는 칼바람처럼 쌀쌀하기만 했단다.
-그 매정하신 할머니는 두 번째 남편의 병수발로
몇 해지나지 않아서 자식들의 피같은 돈으로 차린
순대국밥 집을 쫄딱 말아먹었단다. 내 엄마가 자주했던
말처럼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가
거짓만은 아닌 듯도 했다. 그렇다면 곧, 나쁜 아버지는
벌을 받아야하고 착한 내 엄마는 복을 받을 날도 빨리
와야만 했다.-
뿔뿔이 흩어졌던 어린 시동생들이 간간이 월급을
탄 날이면 이웃에 할머니 몰래 먹을 것들을 사들고
찾아와서 함께 보내기도 했었다고...
그 시절을 회상하며 그때가 그리운 듯 내 엄마는
말씀을 하셨다. 엄마의 말을 들으며 또 다른 상념에
빠지는 딸의 심정도 모른 채로 말이다.
사춘기 딸에게 엄마가 위로차 건넨 말이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아버지는 내 엄마에게
미안해서라도 잘했어야만 했다.
비빌 언덕이라고 찾아간 자신의 엄마에게
외면당한 아버지였다면 그러지는 말았어야 했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혔던 내 엄마를 데려와서
신 김치쪼가리 하나 주지 않던 시어머니 곁에서
배고픔 설움까지 당하게 했다면 말이다...
친할머니가 집에 한번 다녀갔다 하면 아버지는
더욱 엄마에게 포악질을 떨었다. 고스란히
당하던 내 엄마도 그런 날이면 소리 죽여 울지 않고
내가 울었던 것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어버리곤 하셨다.
그래서 어린 나도 이유 없이 싫어했던 내 할머니였다.
그리 매정했던 친할머니는 한 번씩 우리 집에
왔다하면 빈손이었다. 그리고 돌아 갈 때면 준비해온
보자기로 엄마가 손질해서 말려 놓은 생선부터
우리 동네 산을 휩쓸며 캤던 도라지와 더덕,
고사리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바리바리 싸서
양손으로 든 것도 모자라서 머리에까지 이고도 중심을
잃지 않고 잘도 걷던, 내 눈에는 기인이기도 했다.
외할머니는 한번 다녀가셨다 하면 엄마가 할 일을
대신 했던 반면 친할머니는 쉴 사이 없이 바쁜 며느리가
들어와서 밥을 할 때까지 손 하나 까딱 않고 차려 주는
밥만 드셨다. 돌아가기 전 날이면 작정한 것처럼
당장 굶어 죽을 것 같은 징징짜는 소리의 말들만
늘어놓았다. 그리고는 밤잠 설쳐가며 생선 가시로
손끝이 곪고 닳은 손으로 번 돈을 서슴없이
발걸음도 가볍게 받아 들고 갔던 할머니셨다.
아버지의 엄마는 그런 분이셨다.
그런 사람을 엄마로 둔 아버지는 면목이 없어서라도
내 엄마에게 그러지는 말았어야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친할머니가 재가해서 낳은 자식인,
아버지의 씨가 다른 <동생>이 하나뿐인
딸래미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쳐버렸다면
엄마에게 미안해서라도 잘했어야만 했다...
내가 기억 못하는 옛 일들을 지금까지 고스란히
머릿속에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둘째 이모와
이모부, 셋째 이모와 외할머니의 푸념들과
그리고 간간이 나를 다독이며 해주셨던 내 엄마의
경험담을 고스란히 들으며 컸기 때문이었다.
들었던 모든 것들을 나는 마음으로 짜깁기 하듯
나름대로 정리했고 때론 정리가 안되는 것은 그냥
담아둔 채로 자존심 강한 나는 누구에게도 말 못하는
그것들을 간직하며 속앓이로 사춘기를 힘겹게 보내야만 했다.
-한마을에 살면서도 발길주지 않는 할머니 때문에
마을에서 말들이 많았단다. 그곳에서 더는 버티지
못하고 내 부모님은 엄마의 둘째 형부가 운수회사로
근방에서 알아주는 부자로 있을 때, 이모의 권유로
찾아 들게 된 서해의 작은 바닷가였다고 했다.
머슴, 나무꾼, 계란장수, 공사장의 인부...안 해 본일
없다던 아버지가 그곳에서는 버스차장을 했단다.
무슨 팔자인지 아버지는 그곳에서도 이모부에게 갖은
수모를 당했단다. 눈칫밥으로 어릴 때부터 사시던
아버지가 굶어 죽더라도 더는 못 견디겠다며 엄마에게
남의 배를 타보겠다고 했고 엄마는 두말 않고 아버지
뜻에 따랐단다. 둘째를 낳고 아버지를 도와서 바닷가로
업고 다니던 엄마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잠시 친할머니에게
맡기자는 제의를 했단다. 선택이 여지도 없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잠시 보내졌던 곳이었단다.
당분간 두려던 딸이 너무 보고 싶어서 한 달도 못 버티고
나를 데려왔을 때 순하디 순하던 딸래미가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매일 찡얼대며 울어대서 미울 정도였단다.
‘울보’가 되어버린 딸이 어느 더운 날 바다에서 돌아와 보니
방바닥에 널부러진 채로 의식을 잃고 있었단다.
놀란 부모님은 읍네 병원으로 딸인 나를 데려가셨고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의사의 말에 혼수상태에 빠진
4살짜리 딸을 다시 다급함에 장화도 벗지 못한 발로
아들은 엄마가 업고 딸은 아버지가 업고서 서울의
큰 병원만 찾아다니며 돌아 다녔다고 했다.
“제 딸 좀 살려주세요. 돈은 어떻게든 벌어서
갚겠습니다.“
갖은 돈 없는 젊은 부부는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울며불며 통사정을 했단다. 하지만 돌아오는
말이라고는 매번,
“여기가 돗대기 시장인줄 아세요? 다른 데로 가보세요.”
라는 매정한 소리뿐이었단다.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곳을 떠돌다가
땀을 물처럼 쏟아내며 깨어나지 못하는 딸을 끝내
두 분은 다시 집으로 데려 올 수밖에 없었단다.
좌절감에서 어쩌지 못하고 있을 때 둘째 이모부의
도움으로 찾을 수 있었던 수원의 한 개인병원으로
두 분은 작은 희망을 안고 찾아갔단다.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우리의 실력으로는
목숨만은 살릴 수도 있겠지만... 장애자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두 분이 선택하세요.“ 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어야만 했단다. 그 순간부터 시작된 아버지의
변화였다고 했다.
고심 끝에 내린 아버지의 결론은 딸의 ‘죽음’이었고
반대로 맞서듯 엄마의 결정은 딸의 ‘생명’이었단다.
딸의 죽음을 원했던 아버지는 그 날부터 병원에
오지를 않고 매일 술을 마셔댔단다.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찾아오신 할머니가 하신 말씀이,
“내가 밥 먹으라고 자고 있는 저것을 명렬이에게
깨우라고 했더니 갑자기 방에서 애가 자지러지게
울더라. 명렬이가 집어던졌는지 움직이지 못하고 허리가
아프다길래 밥 먹여서 동네 침잘 놓는 사람에게 침 맞혔다.
괜찮았는데 갑자기 왜 그런 겨?“
하고 자신의 탓은 아니라는 듯, 덤덤하게 말씀하셨단다.
아버지도 두 귀로 똑똑히 들었던 그 소리였다는데...
매일 술 먹고 복날 개 패듯 엄마를 패던 아버지의
입에서는 여지없이...
“니 년 때문이야!!!...이 모든 것이
니 년 때문이라구!!!“ 라는 말뿐이었다.
아버지는 내 엄마에게 그 모진 짓을 해서는
아니 됐던 거였다. 그런 말할 자격은 입이
열 개, 아니 백 개여도 할 수는 없었던 거다.-
참 우습지...
이모는 나 때문이라고 했는데
내 아버지는 또 엄마 때문이라고 했으니...
어쨌든 결론은,
엄마가 힘든 것은 나 때문이고,
아버지가 힘든 것은 엄마 때문이란 거였다.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결론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