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만 되면 꽃집이나 화원 안팎으로
형형색색 모양도 사뭇 다른 국화꽃이 만개하다.
향기도 강한 그것들이 이 나이가 되고서야
‘좋구나...’ 느낄 수 있다니...
감성과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던 내가 아니었나싶다.
학창시절 ‘섬 머슴아’, ‘깡패’, ‘왈가닥’이라는
보통의 여학생이 하나 갖기도 힘든 그 별명을 아니 그 중
한 가지만 들어도 입이 쌜쭉해서 다닐 소리를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달고 살았지만 그냥 덤덤히, 나도 내가 ‘조신’과는
거리가 먼 ‘여성’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받아들였던 것 같다.
언젠가 배가 출출한 쉬는 시간에 입안에 침을 가득
물은 친구 하나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우리들에게
“너희는 어떤 음식이 제일 좋아?” 하고 물었다.
다양한 음식들이 나왔던 것 같다.
“나는 사과.” “난 일절미가 좋아” “음...곶감이 먹고 싶다.”
“음...과일이라면 다 좋아...” “나는 과자가 좋아. 비스켓 종류.”...
하나같이 당장에라도 그것들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간절한 어투로 침까지 먹음은 상태였다.
곧이어 마지막까지 입 닫고 있는 내게 아이들의
시선이 몰렸다. 나 역시 처음 질문이 시작된 순간부터
좋아하는 음식을 떠올린 순간부터 입안에 침으로
홍수가 날 지경이었다. 간절한 그 음식을 갈망하는
눈초리로 나는 입을 열었다.
“뱀장어...”
“!!! 꺄~~~!”
그렇게 살갑게 굴던 가시나들이 하나같이
호들갑스럽게 난리도 아니었다. 자리를 박차고
소름 돋은 피부를 문질러 대는 것들까지 있었다.
나는 그것들의 반응이 오히려 이해할 수 없었다.
좋아하는 음식이 무어냐기에 좋아하는 것을
입에 올렸을 뿐인데, 그리고 왜 좋아하는 음식이
딱 하나여야만 하는지, 그것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아직 끝을 맺지 못한 얘기로 마무리 지었다.
“돼지불알도 맛있어.”
“야!!!~~~ 그만!!! 점심 먹을 시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야단법석이 난리도 아니었다.
그 날 이후 내게 붙은 또 다른 별명 한 가지가 ‘별종’
이었던 것 같다.
바닷가 어부의 딸로 자라면서 부모님과 살기보다는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을 때가 더 많았던 어린 시절.
늘 비린내 물씬 풍기는 우비를 입고 장식처럼 달고
다닌 생선의 비늘... 내 부모님의 모습이셨다.
오리쯤 떨어진 거리를 두고 나와 동생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토요일에 내려가서 일요일이면 올라와야 했다.
일주일 만에 만나는 엄마가 보고 싶은 급한 마음에
가방을 집에다 놓지 못하고 쪼르륵 부둣가로 달려갔던,
아련한 추억 속 그 시절...
늘 병치레로 가슴 아픈 딸이 골라버린 생선들로
가득한 부둣가. 그 길을 뛰어오다 딸이 넘어질까봐,
“엄마!!!” 하고 달려오면 골라서 팔던 생선들을 팽개치고 달려
오던 내 엄마셨다. 다른 집은 일찍 하교한 아이들까지
불러내어 그물 속에 한데 섞인 생선들을 새우부터 게와
장어, 광어, 도다리, 장대, 지렁이...등 골라내는 것을
시키기에 급급한데 우리들은, 그 중에서도 나만은
비늘로 까칠한 얼굴로 볼을 비비기가 무섭게 늘 엄마는,
“집으로 들어가, 엄마도 얼른 팔고 들어갈게” 하셨다.
아무리 일찍 팔고 들어와도 해를 넘긴 시간이셨다.
우리들을 위해서 팔지 않고 남겨 온 물 좋은 생선들이
늦은 저녁상에 빼곡이 올려지곤 했었다.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엄마는 늘 숯불에 한번 살짝
익히고 고추장 양념장을 입히고 다시 한 번 구워내는
장어구이를 곧잘 해주셨지만 그렇지 못할 때면 낙지
볶음양념으로 장어볶음을 해주시곤 하셨다.
난, 내가 그리 먹고 살았기 때문에 다들 그렇게만 먹는 줄
알았다. 그 음식이 그리 혐오를 줄거라고는 진정 난 몰랐었다...
바닷가 사람들은 술을 물마시듯 사는 것 같다.
고단하고 힘든 바다 일, 작은 날씨 변화에도
일렁이는 파도 속을 뚫고 드나드는 목숨 건 일을
술로 달래는 듯 사람들은 술을 마셨다.
그 중 내 아버지는 굴곡 많은
힘겨운 삶의 버거움을 잊고픈듯 더 한 술로 사셨다.
그 시절 그게 싫어서 나는 절대 술 먹는 남자를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우습게도 못지않은
남자를 만나고 말았다.
부둣가에 홀로 남아, 잡아 온 물건들을 팔고 있는
엄마에게 나는 ‘혹시나’하는 마음으로
“아빠는?” 하고 여쭈면,
“어디서 술 마시겠지...” 하는 ‘역시나’하는 대답을
하시곤 했다.
세상 무서운 것 없을 것 같은 내 아버지가
무서운 ‘척’하던 나... 나는 그것을 적절히
사용할 줄 아는 약은 가시나기도 했다.
술에 취해서 엄마를 힘들게 하는 것이 싫어서
늘 아빠를 찾아서 갈매기 떼와 석양이 아름다운
작은 바닷가 마을을 이곳저곳 후비고 다녔다.
어느 날은 ‘고모네’라 불리는 구멍가게 안에서,
또 어느 날은 ‘산장집’이라 불리는 마당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아버지를 만났고 취기가 오른
분의 손을 이끌고 집으로 향했던 기억이 많다.
어느 날, 어느 집에서 돼지를 잡은 날이었다.
붉게 녹슨 드럼 틍의 반을 잘라서 만든
바비큐그릴에 번개탄 몇 개 넣고 납작한
돌 위에 고기를 구우며 소주잔을 기울이던
아버지를 보고 언제나처럼,
“아빠!!!” 하고 달려갔더니 다른 때와 달리
살짝 당황해서 하시는 말씀이
“응, 아빠 금방 집에 갈게, 얼른 너도
들어가 있어.“ 하셨다.
맛난 냄새 물씬 풍기는 푸짐한 고기 앞에서
아빠만 입에 오물거리고 드시면서 딸래미는
가라는 말씀에 눈물이 솟구치는 배신감으로
나는 입을 댓발 내밀고 있었다.
그런 딸의 모습에 당황하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동네 분들이 나를 달래셨다.
“왜 그랴? 애도 먹게 두지... 먹어라, 너도...”
나뭇가지를 대충 잘라서 만든 젓가락을 내밀어
주셨지만 나는 아버지의 눈치만 보고 선뜻
주신 것을 잡지 못했다.
고집스런 딸래미를 어쩌지 못하고 아버지는
체념하듯,
“그럼 조금만 먹고 가...” 하셨다.
먹는 것은 풍족했던 우리였다.
어린 시절 못 먹고 산 한을 자식에게만은
겪게 할 수 없다면서 <대장간에 식칼 없다>라는
속담을 반박하듯, 잡히는 좋은 생선들을 팔지 않고
우리에게 먹이셨고, 쇠고기와 돼지고기, 닭고기는
냉장고에 쟁여놓고 먹이셨다.
입이 짧은 나였기에 부모님의 바램만큼 먹지
못했던 내가 모처럼 입맛에 맞는 쫄깃함에
나뭇가지 젓가락을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 맛난 것을 앞에 두고 딸을 가라던 아버지가
야속했던 내가...
“와!!! 아빠 이거 진짜 맛있다. 무슨 고기야?”
하고 물으니 아버지께선 선뜻 대답을 못하셨다.
곁에 계시던 아버지 친구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대신 답을 하셨다.
“맛있냐? 이게 ‘돼지불알’이라는 거다.” ...
돼지불알... 세상에는 참 이름도 요상한게 많음을
익히 알았던 나...
참 못나게 생긴 생선 이름이 어울리게도 ‘삼식이’였다.
망둥이처럼 생긴 촐싹 맞은 생선을 ‘짱뚱어’라고도 했다.
썩어도 ‘준치’가 있었고 놀란 눈이라 그런가 ‘놀래미’도
있었다.
그런 것을 당연한듯 토를 달지 않고 받아들였던
나였기에 고기부위 중에 이름이 그냥 ‘돼지불알’
인줄만 알았다.
그날 이후...
부둣가에서 많은 인파들 속에서 생선 고르기에
여념 없는 아버지 곁으로 쪼르르 달려가던 내가
많은 사람들의 시끌벅적거림에 내 소리가 먹힐까
큰 소리로 말한 적이 있었다.
“아빠!!! 나 또 돼지불알 먹고 싶어!!!”
“...!!!...”
그날 저녁,
늘 술주정에 아버지께 시달리던 엄마께서
모처럼 목에 힘을 실고 아버지께 따져 묻던 밤이었다.
간간히,
돼지불알 얘기가 우리들의 방까지 들려왔지만,
난 그 후로도 오랫동안 돼지불알이
돼지의 거시기였는지 몰랐었다.
아버지는 그 구하기 어렵다는 돼지불알을
구해서 일주일에 한번 오는 자식들의 밥상에
낙지와 장어대신 올려주셨다.
쉽게 먹을 수 없는 그 귀한 고기를 나는
당당히도 좋아하는 음식의 목록에 올렸던 것뿐인데,
가시나들은 ‘뱀장어’하고 대답했을 때보다
더 지랄들을 떨어댔던 ‘돼지불알’ 대답 앞에
왜 굳이 ‘별종’이라고 이름 붙였는지 이해 못한
우둔함을 지금에야 탈출하듯...깨닫는 것 같다.
할머니께서 마당 한가운데 정성스레 키워놓던
국화꽃 앞에서 별로 이쁘지도 않고 향기까지 별로인
그 꽃이 싫다며 다른 것으로 바꿔 심으라며
떼쓰던 옛날이 왜 갑자기 떠오른 걸까...
누가 그랬다.
나는 색다른 생각구조를 지닌 듯하다고...
그래서 분위기 좋은 국화꽃을 보다가
추억 속을 뒤집고 그 많은 것들 중에
하필이면 ‘뱀장어’로 시작한 것이
‘돼지불알’로 마무리 짓고 있는 것을 보면...
생각구조뿐만 아니라...뇌구조도 살짝 틀어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렇게 점점 남들의 얘기를 귀담아
듣는 사람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