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황빛 가방을 어깨에 메고 학교로 향했다.
영어, 수학...몇 권의 책들과 사다놓았던
크림빵과 소보로빵을 간식으로 넣은 가방이
제법 도톰해졌다.
어느 지방엔 벌써 첫 얼음이 얼었다는데
서울 도심의 한복판, 내가 가는 길가엔 아직도
녹색의 파릇한 여름을 품고 서있는 나무들의
흔들림에 매료되기 딱 좋다.
노랗게 물들기도 전에 바닥으로 떨어진
은행들이 처참하게 바닥에 껌딱지처럼
흔적을 남기고 있다.
멀쩡한 것을 찾아 헤매는 몇 분의 노인들이
검정비닐 봉투를 들고 있는 모습에
나는 문득 장 프랑수아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은행을 줍는 노인이나, 이삭을 줍는 여인들은 모두
생활을 영위한 공통된 노력의 모습...
“안녕하세요...”
“응...그래, 안녕...”
.
.
.
“어? 어디가? 차나 한잔 마시자”
“오늘은 안되고, 다음에...연락할게”
친구들의 아이나, 친구들과 안면을
나누고 인사를 나누며 아쉬운 듯 학교로 향했다.
흐린 기억 속에 점점 묻혀가는
초등학생시절, 네모난 사각가방을
등에 맨 것은 아니었지만 딸의 학원가방을 들고
딸의 초등학교로 향했다.
화요일, 목요일, 금요일은
하교시간이 늦어서 학원수업 늦을까봐
동동 구르는 딸 걱정에 햏하는 일이지만
때마다 새삼 묻혀가는 나의 어린추억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XX초등학교 정문에서 딸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별관과 본관으로 나눠진 3개의 건물과
모래 빛과 흡사한 운동장 바닥,
구령대 주변으로 오래된 향나무와 모과나무,
개암나무... 본관의 모습을 가릴 만큼 제법 울창하다.
햇살이 잘 드는 학교 안에는 제법 가을이
물들기 시작한 것 같다.
가장자리부터 노랗게, 혹은 빨갛게 물들기 시작한
나무들이 많다.
저 만치서 “엄마!!!”를 외치는 딸과 친구들이
무리지어 달려온다.
4학년... 이제 저는 어린이가 아니라 청소년이란다.
그때 나도 그랬지... 어린이와 청소년의 차이가
뭐에 그리 대단한 차이라고... 어깨에 힘주고
으쓱했었지...
“엄마, 이거 이쁘지요?”
딸이 가리킨 곳에 커다란 화분에 소복하게
피어난 소국이 있었다.
노랑바탕에 자주색 테두리, 생소한 빛깔의
소국이 그때서야 눈에 들어왔다.
향기가 그윽한 그것을 딸의 말에 볼 수 있었다니...
그런 눈으로 가을을 보려했다니...
꽃과 꽃 사이로 몇 마리의 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아... 화분에도 가을이 피어있었다...
“응, 너~무 이쁘다...”
헤헤 거리는 딸과 친구들이 우왕좌왕 다가왔던 것처럼
다시 그러고 멀어져갔다.
가을 남자의 계절이라고 했지?
왜?
가을만 되면 센치해지는 내가있고 친구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가을...
바바리코트의 옷깃을 세우고...떨어지는 낙엽을
밟으며...‘시몬’이 오빠인지, 언니인지...
그를 부르며 거리를, 숲길을 헤매고 다니고픈
사람들이 남자만은 아닌데...오히려 여자들이
많을성도 싶은데...
.
.
.
그래...나도 이제 분위기를 잡아보자...
늘 칙칙하게 있을 수는 없는 거잖아.
내게 존재하지도 않았던 교양을 주변에서
얻어 보기라도 해보자...
크지도 않은 눈으로 실눈까지 만들지는 말자...
타고난 목청의 볼륨을 한 단계 낮춰보자...
.
.
.
간밤에도 술로 들어온 남편이었다.
아침에 부스스한 모습으로 일어나서
화장실로 향했다.
아이들이 아침을 먹고 학교 갈 준비로
분주할 때였다.
제 몸에서 나는 쾌쾌한 냄새는 어쩌고서
늘 주변 것들에만 예민하다.
늘 똥 묻은 뭐가 겨 묻은 것을 나무란다.
“해피~ 이 놈 또 오줌 쌌구나... 아휴, 냄새...
오줌도 쪼끔 싸면서 냄새는 아주 지독해...
이 놈 이거, 병 걸린 거 아냐?“
물을 뿌리면서 계속해서 궁시렁이다.
아들이 머리가 아프다면,
잡생각을 많이 해서 그런거랬다.
딸이 다리가 아프다면 말을 안 들어서
그런거랬다.
내가 어디 아프다면 성질이 지랄
맞아서 그런거랬다. 말만하면 진단까지
내리는 신통한 능력...썩히기엔 영 아깝다.
.
.
.
교양을 챙기고픈 내가 한 단계 볼륨을
낮춘 말로 말했다.
“니들 아빠는 설비 노가다 하기엔 아까운
존재야. 확인도 전에 진단까지 내리고
처방까지 내리는데...이건 허준도 따라가지
못할 경지다...“
내 말을 듣고 딸이 웃으며 말했다.
“아빠! 그럼 간호사(-_-;;;) 하면 되겠다.”
의사도 있는데 간호사라니...정신연령이
청소년은커녕 아동에 가까운 딸의 대답에
굳건한 목소리로, 밤새도록 마신 물을
꿋꿋한 자세로 서서 빼내던 남편이 말했다.
“근데, 아빠가 나이가 좀 많다. 안 써줄 거야.”
아... 도진다...반응한다... 내 혈압이...
“아빠가 차리면 되지요...”
“그럴까?...”
듣자하니 둘의 대화가 점점 무르익으며
점점 가관으로 발달 되어간다.
이건... 시트콤이다...
내 인생은... 스트콤...
카드사에서 캐피탈에서 연실 와대는
전화에도 며칠 전 이성을 버리며 마신
술로 젖어 들어오던 날,
“내가 오늘 술값 냈다. 많이 썼다. 50만원이 돈이냐?!”
를 밤새 외치던 남편이,
어제 교통비가 없다면 만원만 있으면 달라고 했었다.
50만원이 돈이냐며 남들에게 술 샀다는 분께서
13,000원 삐죽삐죽 받아 가서 또 무슨 술을
먹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생활에도 당당히 딸과 떠들며
오줌발을 날리고 있었다.
에혀...가을이 깊어 갈수록...나도 깊어만 간다...한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