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똑같은 고질적인 일상을 벗어나고 싶어서
안달하던 때가 차라리 그립다.
그때는 날아다니는 먼지 속에서도
인생을 비유할 주제를 찾았고
나름 개똥철학이라도 했던 것 같다.
열정과 열성... 뜨겁게 타오르던 적이 내게도 있었는데...
서늘해지는 가을바람 속에 그마저도 식어버린 듯 나는 형체만
남았을 뿐 존재의 이유가 없다.
더 이상 떨어질 바닥은 없을 듯 추락을 여럿 경험했지만
내가 있던 곳이 그래도 제법 고지였던 걸까,
철렁이는 아찔함과 까맣게 타들어가는 속을 계속 느끼고 있으니...
하지만 나는 이렇게 오늘도 존재한다.
곧 죽을 듯 당장에 어떻게 되버릴양 발광을
했다가도 배터리 나간 장난감처럼 머지않아 잠잠해진다.
나를 걱정해주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나는 외로운 고독감에 어쩔 줄을 모른다.
힘겨움을 털어 놓기보다 차라리 함구할 때가 많아졌다.
“별 일 없니?”
“응...”
“괜찮아?”
“응...”
“차라리 네가 수다스럽게 미주왈 고주왈 떠들어 대던 때가 그립다.”
주고받는 대화가 점점 간단해진다.
왜냐고 왜 그렇게 됐느냐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무 빤해서... 삶이 훤해서... 재미없어. 지금 이렇게 힘겨워하지만
나는 다시 곧 잠깐의 휴식을 얻게 될 거고,
그 휴식 속에서도 다시 뭔 일이 생겨날 것을 미리 걱정 할 거고...
걱정하던 일이 벌어진다면 나는 다시 허무하고 허망한 고통 속에서
바둥 되겠지... 매 순간 되풀이 됐던 고통들에 대해서
이제 더는 미주왈 고주왈 떠들고 싶지 않거든...
이렇게 사는 것이 나만의 일이 아니잖아...
당신도 나와 뒤지지 않는 삶을 살고 있을 테니...
빤한 일, 빤한 답변 이제 싫어.“
우울증 말기 환자의 표본 적인 답변이 아닐런지...
시장에서 안면 있는 깡마른 여자 분을 지나친 적이 있었다.
남편으로 보이는 사람과 진열된 옷들을 둘러보고 있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 그 분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는데
형편이 많이 어렵단다.
남편은 일용직을 했었는데 그마저도 일이 없단다.
바람만 불어도 픽 쓸어 질것 같은 그 분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4식구가 겨우 먹고 산다는데 가만있어도 안 아픈 곳이 없다는
그 분에게 남편은 수시로 폭력까지 행사한단다.
곁에서 찾아와 줄 친정식구도 없다던 그 분이
시장에서 남편으로 짐작되는 사람과 웃고 있었다.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그 분에 비하면 소유한 것이
더 많은데... 그럼에도 그분보다 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상에 비밀이 있기는 한 걸까?
나와 직접적인 대화를 해본 적이 없는 그 분에 대해서 나는
당사자 아닌 제3자를 통해서 속속들이 잘 알게 되었다.
그분은 그 사실을 짐작도 못할 텐데.
그 속내를 알고 있다는 사실도 그 분에게 미안했다.
믿고 치부 같은 속내를 털어놨을 텐데,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사람은
나한테만 해주는 거라며 누구에게 말하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묻지도 않은 사건들에 대해서 일일이 들은 대로
내게 전해주었다.
인심 좋게 비밀을 털어놔준 분은 어쩌면 내 일들에 대해서도
깡마른 여자 분에게 얘기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깡마른 분과 나는 어쩌다 스치게 되면 반갑게 웃음 뛴 얼굴로 인사를
주고받곤 했다.
매번 나는 차마 뱉어내지 못하고
‘아줌마, 힘내세요. 좋은 일 있겠죠.’하는
마음으로 한껏 웃어주곤 했는데,
그 분 역시 어쩌면 ‘애기엄마, 힘내. 좋은 일 있을 거야.’라는
마음으로 웃음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여자들은 저마다 모여서 남의 일을 걱정해준다.
자신의 얘기보다는 ‘누구네 집은 좀 어때?’로 시작해서
결론과 의미 없는 수다들로 더울 때는 그늘 찾아,
추울 때는 햇볕 찾아 하나 둘 모여앉아 시간을 축내곤 한다.
그것이 여자들이 남자보다 명이 긴 이유라는데,
나는 좀체 그런 자리에 오래 앉아 있지를 못한다.
사실 살아가는데 정답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모두 내 얘기만 할 수도 없을 테고,
그렇다고 집구석만 처박혀 있기도 뭣하고,
나가서 일한다고 삶이 여유로워지는 것도 아니고
집에서 있다고 애들을 살뜰하게 보살피는 것도 아니고
하늘을 우러러 나 역시 한 점 부끄럼 없어 누구를 논할 자격
없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과 별개라고 말할 자격은 더더욱
없다. 이런 개도 안 물어갈 잡념들을 빨리빨리 떨쳐 버리고 싶다.
의욕상실에서 벗어나고 싶다.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나도...남들도...모두가...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