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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민아.. 안녕...


BY 유림천사 2008-08-11

얼마나 큰  산고인가?

시간이 얼마나 흐른 것일까?

열달의 고생이 무색할 만큼 너무 큰 아픔의 시간.

 

2008년 4월 20일 새벽 5시 30분.

소변이 마려워서 화장실에 갔다.

배가 불러올 수록 소변은 더욱더 자주 마려웠고...

막달인 그날 새벽도 방광의 압박에 눈을 떴다.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일어서는데...

이슬이 비쳤다.

신랑을 깨우고 병원에 가자고 재촉을 했다.

진통은 없었으나 초산인 나에겐 당장 출산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하고, 언니에게 전화를 하고 병원에 갈 준비를 시작했다.

 

아침에 도착한 병원은 한산했다.

정확히 말하면 접수처에 아무도 없었다.

분만실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가 이슬이 비쳐서 왔다고 간호사에게 문의를 하고 접수를 했다.

접수를 하고난 뒤에도 나름 한참을 기다린 것 같다.

사람들도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빠는 밖에서 기다리라고 했고, 산모인 나는 검사실 안으로 들어갔다.

태동검사와 자궁수축검사를 받았다.

검사를 마친후에 의사를 만나서 내진을 받았다.

아직 자궁문이 열리지 않았고 산통이 5분~6분간격으로 올때 다시 오라는 진단을 받고 나왔다.

배가 많이 고파왔다.

그래서 신랑과 함께 아침을 먹으러 갔다.

 

출산예정일을 5일 남겨둔 그날 더이상 진통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 진통이 다시 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가지온 짐을 병원에서 가까운 언니집에 풀어 놓았다.

 

2008년 4월 21일

다시 아침이 밝아 왔다.

설사를 할 것처럼 배가 아파왔다.

복통에 눈을 뜬 시각이 아침 7시였다.

월요일인 그날은 신랑이 출근을 해야 하는 날이었다.

신랑에게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다고 알렸고 신랑은 진통간격을 기록해 보기 시작했다.

둘쭉 날쭉한 진통이었다.

그래서 신랑은 출근을 하기로 결정하고 병원으로 가게 되면 바로 연락을 달라고 했다.

신랑도 언니도 형부도 모두 출근한 집에서 혼자 티비를 보며 진통을 기다고 있었다.

잠시 후 다시 찾아온 진통은 혼자있는 나를 외롭고 힘들게 했고...

결국 신랑에게 전화를 했다.

신랑은 출근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출산휴가를 쓰고 다시 돌아와야 했다.

다시 돌아온 신랑과 따뜻한 방에 누워서 메모지를 옆에두고 진통이 올때마다 간격을 체크했다.

그리고 친정부모님도 큰딸 집으로 출산이 임박한 막내딸을 위해 달려왔다.

 

오후 4시가 지날 무렵부터 진통간격이 좁혀지기 시작했다.

오후 5시 더이상 체크를 하면서 기다리는 것이 무색하다는 결론에 다달아서 병원으로 가기로 결정을 했다.

신랑에게 부축을 받으며 걸어서 2분도 안되는 거리에 있는 산부인과로 가기 시작했다.

접수를 하고 다시 검사를 받기 시작했다.

자궁수축과 태동검사를 받고 내진을 받았다.

자궁문이 3센치 열렸다는 진단을 받았고 바로 가족분만을 위한 진통실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길고 치열한 진통이 시작되었다.

오후 5시 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진통.

그때까지는 우아하게 출산교실에서 배운대로 신랑앞에서 추하지 않게 아픔을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저녁 10시가 넘어가면서부터 이성의 끈은 고통으로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소리를 지리기 시작했고....

원망의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너무 아프다고 아무리 말해도 자궁문은 3센치에서 더이상 열리지 않았다.

입원을 할 때 의사가 자궁문의 상태를 보고 말히길 \"새벽 2시면 낳겠네.\"라고 진단을 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진통을 하고 새벽 2시 3시가 넘어가도 자궁문은 3센치에서 더이상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침이 되어갈 무렵에야 3.5센치가 되었고... 나의 자궁문은 잘 열리지 않았다.

계속되는 진통에 헛구역질이 나오기 시작했고...

입술은 다 타버렸다.

결국 수액을 맞았고 산소공급을 위한 호흡기도 달아야했다.

그렇게 계속 진통을 했다.

아침이 다되어서 터진 양수...

정확히 양수가 터진 시각을 지금은 알수가 없다.

하지만 곧 알아 낼 것이다.

 

양수가 터지고도 지옥같은 진통은 계속되었다.

허리 진통을 한 나는 밤이 새도록 눕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고 의자에 기대 앉거나, 신랑에게 기대서 서서 진통할 수 밖에 없었다.

너무나 지옥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오전 8시 경에 자궁문이 거의다 열리기 시작했다.

힘을 주라고 하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열심히 힘을 주었지만...

나의 힘이 부족했는지 간호사 둘이 내 배를 누르기 작했다.

너무 아팠다.

신랑의 눈물이 보였다.

끊임없이 흐르는 신랑의 눈물이 보였다.

너무 힘들어서 지쳐가고 있었다.

의사가 소리 질렀다.

\"산모 지금 이러면 안돼요. 힘내요.\"

내가 낼 수 있는 모든 힘을 다 낸것 같았다.

얼굴이 빨개진다고 어떻게 하냐는 신랑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고..

힘을 더 주라는 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속해서 힘을 주고 또 힘을 주었다.

 

남편과 함께 진통을 하면서 2008년 4월 22일 오전 9시 21분 우리 수민이를 낳았다.

 

출산이 임박했을때 의사가 말하길 \"엄마가 가슴에 손올리며 안돼요. 아기 낳으면 바로 가슴에 올려줄 꺼에요.\"라고 했다.

하지만 기나긴 진통 끝에 낳은 우리 아기를 안아 볼 수가 없었다.

 

자연분만으로 아기를 낳은 나는 회음부치료를 위해 분만대에 누워 있었고, 신랑은 회음부 치료과정이 시작될 무렵 밖에서 기다리라는 얘기를 듣고 밖으로 나갔다.

생생한 느낌...

누군가가 아기 낳는 것이 너무 아파서 회음부 치료는 잘 모른다고 했던가?

마취조차 해주지 않고 치료해주는 과정의 생생한 느낌이 다 전해져 왔다.

치료를 마쳤는지 회복실로 돌아가라는 간호사가의 얘기에 아기를 보여달라고 했다.

아기를 받아준 의사가 아기가 태변을 먹어서 치료중이니 회복실로 가라는 것이었다.

난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분만대에서 내려 오지 않겠다고 버티면서 아기를 보여 달라고... 우리 아기를 보여 달라고 울면서 매달리기 시작했다.

문밖에서 신랑이 듣고 있었는지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상황을  설명하라고 다그치기 시작했다.

 

아기는 태변을 먹고 태어났고 상태는 심각했고... 아기는 응급처치를 하기 위해서 다른 방으로 옮겨졌다고 했다.

 

입원실에 도착해서 시체처럼 누워있었다.

오줌줄도 꼽고 닝겔을 맞으면서 누워 있었다.

자연분만을 했지만... 난산을 한 나는 너무 많이 아팠다.

먹지도 못하고 누워서 휴식을 취하다가 오후에 처음으로 거울을 봤다.

눈동자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눈의 혈관이 모두 터진 것이었다.

얼굴도 모두 터쳐서 내가 아닌 것 같았다.

검게 터진 얼굴과 빨간눈... 정말 너무 처참한 모습이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고 호소를 했고 이런 저런 체크를 해주었지만....

아기를 보지 못해서 심리적으로 압박이 와서 그런것 같다는 진단을 내려주고 푹쉬라는 의견만을 남겨줄 뿐이었다.

그리고 난 다시 잠이 들었다 깨었다를 반복했다.

 

저녁에 신랑이 다시 병실로 찾아왔다.

아기때문에 대학병원으로 가서 이런 저런 처리를 하느라고 너무 바빴다는 얘기에 눈물이 났다.

그리고 가운을 가라 입혀주었다.

신랑이 너무 속상해 하는 것이 느껴서져 다시 거울을 보았다.

등까지 검게 핏줄이 터져 있었다.

온몸에 성한 곳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게 출산을 하고 아기를 보지 못했다.

바람빠진 풍선같은 배를 보면서 내가 아기를 낳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히지만 우리 아기는 어디 있는 것일까?

 

 

 

 

참고로 출산은 곽생로산부인과에서 했으며...

대학병원 신생아 중환자실로 이송될때까지 걸린 시간은 한시간이 걸렸다.

늦은 조치로 인해 우리 수민이는 현재 심각한 태변흡인 증후군으로 고생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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