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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불꽃의 여자, 나혜석


BY Suzy 2000-11-18


"불꽃의 여자, 나혜석" 내가 본 연극 제목이다.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진보적인 의식으로 절대복종형 여성상을 강요하는 유교문화에 도전장을 냈던 선각자--
이쯤에서 나는 강렬한 페미니스트라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나는 연극을 보면서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세상에 그토록 팔자를 잘 타고나기가 쉬운가 말이다. 그녀는 선택된 여자였다!

지금으로부터 근 백여 년 전에 딸자식을 일본유학 보낼 수 있는 가정이 얼마나 되었겠는가?

물론 유학 가기 전 그녀의 총명함이나 재능은 진명 학교 수석졸업으로 증명되었다지만 가정적인 후원 없이는 학교교육 자체가 어려웠던 시기였었다.
(그 시대 우리나라 여성의 90%가 문맹이었었다 한다)

내 어머니가 그녀와 비슷한 시기를 살다 가셨으니 비교를 안 할 수가 없었다.
나혜석, 그녀가 내 어머니와 같은 환경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수많은 여성들이 교육은커녕 기아에 허덕이며 生과死를 넘나들 때 그녀는 "自我"를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적으로 엄청난 괴리감을 느낄수밖에 없었다.

미술전공 최초의 동경 유학생, 최초의 여성화가, 최초의 여성시인, 작가, 소설가, 경성 최초의 서양화 개인 전, 최초의 부부동반 유럽여행, 최초의 페미니스트.....등등 그녀를 수식하는 "최초" 란 단어는 그녀자신의 열정이나 재능만으로 가능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져본다.

기본적인 의식주 생활도 해결하기 어렵던 시기에 그만큼 배경 좋은 집안에 태어나 그만큼 교육의 혜택을 받고 능력 있는 남편을 갖추었으니 당연한 결과 아니었겠는가?

그녀의 재능, 용기, 진취성, 그 모든것이 기정사실이라 하더라도
" 저 정도 배경이라면 울 엄니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나의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못 가진 자" 의 심통쯤으로 치부하자.

때로는 즉흥적이고 개인적으로 보여지는 그녀의 삶 또한 공감 할 수 없었다.
출산과 육아 그리고 일 사이에서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에서는 어이없기까지 했다.

혹자는 임신과 출산 육아에 대한 여성의 문제를 사회적인 공론으로 이끌어내 이슈화할 계기를 만들었다고도 보는 시각도 있지만.....

소위 신여성으로 자처하는 지식인이 그런 각오 없이 무턱대고 결혼을 했단 말인가?
연극에서는 모성보다 일에 더 가치를 두는 여성으로 묘사된다(사실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아이를 넷이나 낳았을까?

이상하게 자꾸만 그녀의 이중성 쪽으로 나의 잣대가 기우는것은 내가 그 시대적인 배경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탓이리라?

모든 걸 다 뒤에 두고(아이들과 노모) 남편 덕에 부부가 함께 떠난 파리에서는 외간 남자와 사랑에 빠져 이혼 당한다.(나중에 나혜석은 이남자를 "정조유린..."으로 고소한다)

어떤 이 는 사랑할 권리라고 옹호하지만
"지킬 것은 지키는" 자존심과 책임감 있는 지식인이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자기가 저지른 부정을 용서받으려고 "사랑" 이나 "아이들"을 입에 올리며 남편에게 애걸하는 장면에서는 어떤 치욕 감 마저 들었다.

"잘못했다" 고 후회하는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닌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었다면 좀 더 당당하게 현실과 맞닥트릴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녀 스스로가 자기모순으로 혼란스러워한것은 아닐까?

그녀는 이혼 당할 때 재산 분할 권과 애들의 양육권을 요구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녀가 상당히 진보적인 사고와 함께 행동하는 용기를 가졌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었다.

또한 당시 사회제도와 법률이 그토록 여자들에게 불리했음을 동시에 보여준다.

아이들 양육권은 내가 남편이라도 거절했을 것이다.
그녀는 평소에도 항상 일이 먼저였으니 그런 여자에게 어떤 아비가 자식을 맡긴단 말인가?

사회적으로나 법적으로 지금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겠지만 이혼후의 그녀의 몰락은 실로 충격이었다, 그토록 쟁쟁하던 시대의 인재가 그리 쉽게 무너지다니...

애인이었던 남자에게 도움을 청하나 거절 당하자 그녀는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정조유린에 관한 위자료 청구소송"으로 그를 법정에 세우려한다.(사랑이라더니?)

그렇다면 그토록 잘나고 똑똑한 신여성이 전시회 때 팔린 자기 작품대금하나 관리 못하고 남편 손에 맡겼단 말인가? 그녀의 현실성 결여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참고로 그녀의 전성기 그림 한점값은 당시 고급관리의 일년치 봉급과 맞먹는 액수였다고 한다.)

스스로가 인형으로 살기를 결코 거부했지만 그 틀을 깨는데는 역부족 이었음을 느낀다.

사회적인 편견과 인습의 굴레를 넘어서지 못하고 남편으로부터 홀로서기 에 실패한 그녀는 행려병자가 되어 거리를 방황하다 세상을 원망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우리 남정네들의 치졸함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아무리 이혼으로 끝난 사이라도 최소한의 인간적인 배려는 했어야하지 않았는가?

남자는 축첩을 능력으로 인정하면서도 여자의 부정에 대해 그토록 철저하게 단죄하여 고립시켰던 사회적인 불공평한 이기심 또한 무서운 벽으로 다가왔다.

내가 그녀였어도 그런 불합리한 사회제도를 앉아서 묵과하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그토록 견고한 가부장 제도하에서 스스로의 모순과 이상의 좌절을 안고 방황하는 신여성으로 선각자적인 그녀의 인생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비록 세속적인 삶은 비참했다해도 예술적으로 그녀가 남긴 흔적은 결코 패배하지만은 않았음을 증명한다.

여자이기 이전에 인간이었던 그녀의 외침은 아직도 살아서 우리 곁에 숨쉰다.

"움직이는 자여 실패 있음을 각오하라 하였소, 실패와 성공은 평행 하는 줄 아오, --중략--
탐험하는 자가 없으면 그 길은 영원히 못 갈 것이요" (나혜석, 잡감,[학지광] 중에서)

우리는 오늘도 내가 원하는 자아실현과 숨가쁜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