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깨우는 건 창문으로 살포시 들어오는 때 묻지 않는 햇살이었다. 나는 햇살을 얼굴로 맞으며 두 눈을 비빈다. 창밖엔 듬성듬성 올라오는 잔디가 백일이 돌아오는 아기 머리통 같다. 잔디 너머 모내기를 끝낸 논이 찰랑거리고 그 위로 하늘이 파랗고 그 멀리 산이 진초록이다. 아! 여긴 시골이지. 내가 아침마다 깨어나고 싶은 시골이지. 먼저 일어난 그대가 부엌에서 쌀을 씻고 있을 시골이지. 자기야~~ 일어났어? 그대는 내게 이렇게 말을 걸 시골이지. 이런 상상을 하면서 하얀 마가렛 피어 있는 처마밑 화단을 본다.
이모와 난 저녁형 인간이다. 밤 12시가 넘어 잠자리에 들고 아침 아홉시에 일어나는 닮은꼴, 조카와 이모다. 밥은 어제 저녁에 밥통에 두둑하게 해 놓았고, 매끄러운 아욱 된장국도 끓여 놓았고, 마늘쫑도 간장 넣고 달달 볶아 놓았고, 시금치나물도 살짝 데쳐 조물조물 무쳐 놓았고, 오이지 물김치도 파 솔솔 뿌려 투명한 유리그릇에 담아 놓았으니 세수 안한 얼굴로 차려 먹기만 하면 된다. 세수 안 해도 우리 자기는 예뻐, 상상속의 그대는 내게 이렇게 말할 것이 분명한데...히히히
이모네 시부모님은 먼저 차려 드시고, 이모, 이모부, 셋이서 동그란 나무상에 동그랗게 앉는다. 요즘 시골은 옛날 시골이 아니다. 입식 부엌에 김치 냉장고에 가전제품이 없는 것 없이 편리하고 깔끔하다. 밖은 시골이지만 집안은 도시 그대로를 옮겨다 놓았다. 부엌에 달린 작은방 창 사이로 찔레꽃이 흐드러져 향긋하다.
목장갑을 끼고 내 호미를 찾아 잔디밭으로 나간다. 다시 김을 맨다. 시골에서의 삶은 풀과의 전쟁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이모와 난 잔디 사이의 풀들을 흰머리 뽑듯이 시원하게 뽑아낸다. 잔디 가장자리는 꽃모종을 했고 꽃모종 사이 자생하는 제비꽃이나 고들빼기나 토끼풀이나 달개비꽃이나 개망초꽃은 뽑아 내지 않았다. 야생화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화단을 만드는 게 이모와 나의 두툼한 계획이다.
미국에 타샤투더라는 올 해 나이 아흔인 할머니가 계신다. 오십대부터 천 평이 넘는 산골에서 꽃을 심어 온 분이시다. 긴원피스에 꽃무늬 앞치마와 동일한 꽃무늬 두건을 머리에 쓰시고 오로지 꽃만 심어오신 분. 내 방식대로 자연스럽게 꽃을 가꿔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지신 꽃 할머니 타샤투더.
나와 이모는 이 분처럼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틀에 박힌 정원으로 만들지 않고 소박하고 자연스럽게 가꾸고 싶은 것이다.
집주변 언덕과 논두렁과 밭 자투리 공간에 꽃씨를 마구마구 뿌릴 생각이다. 올 해는 뜰만 가꾸고 가을에 씨를 받아서 내년엔 이모네 집 주변과 논두렁에 꽃씨를 뿌릴 계획을 찬란하게 가지고 있다.
나는 땅이 한 평도 없다. 시골에서 꽃을 가꾸며 살고 싶어도 내 손에 쥐어진 돈이 별로 없어서 상상만 했었다. 상상속 세상에 대상도 알 수 없는 그대를 끼워 놓으며 상상의 날개만 펄럭펄럭 퍼덕이다가 현실에 부딪히면 먼지만 마시며 접곤 했었다.
그러던 중 막내이모의 꿈과 내 꿈과 맞아떨어져 같이 꿈을 펼치기로 한 것이다. 병을 안고 사는 막내이모 혼자서는 힘이 들어서 잔디만 심어 놓고 있다가 마침 내가 손목 부상으로 일을 그만두었고, 그래서 시골로 내려와 이주일 동안 꽃을 뱅글뱅글 심었다.
영국의 꽃할머니 타샤투더는 이런 글을 썼다.
“나는 로맨티스트예요. 낭만적인 내 성격은 현실과 모순이 되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그럭저럭 잘 타협하며 지내왔지요. 로맨티스트는 마음이 자유롭고, 무슨 일이든 마음껏 즐기죠. 로맨티스트가 되는 것이 인생을 즐기는 현실적인 방법일지도 모르겠네요.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일은 마음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운명, 내가 놓인 환경에 만족하며 사는 것입니다. “
점심은 잔치국수였다. 다시마와 멸치 국물을 내고, 그 국물에 감자와 호박을 넣어 끓여 놓는다. 묵은 김치를 송송 썰어 들기름 넣고 설탕 조금 넣어 무치고, 산에서 내려오는 물에 국수를 맑게 씻어 멸치 국물에 말아 김치를 얹어 먹으면?? 다음 말은 필요 없겠지요?
낮잠을 30분 정도 잔다. 그런 다음 과일과 모닝 빵 한 개와 차를 마신다. 나무로 만든 데크에 앉아 샛노랗게 살랑거리는 금계국과 낮에도 피는 노란 달맞이꽃과 주황색 한련화와 함께. 참, 요즘 한참 피는 꽃분홍색 끈끈이 대나물도 함께.
다시 호미를 들고 씨를 뿌려 놓은 뒷뜰로 간다. 제법 큰 꽃모종을 솎아서 잔디 가장자리와 화단에 한 포기씩 한 포기씩 손으로 꼭꼭 눌러 심는다. 다음날이면 시들어 버린 게 하나도 없이 꽂꽂에서 허리를 펴고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화단 가장자리로 작은 자갈들을 쪼르륵 줄맞춰 놓기도 했다. 혹시 누군가 와서 화단인지 모르고 밟을까봐서. 모종이 너무 작아서 풀인지 잔디인지 구분이 안가기 때문이다.
해질 무렵 구들 놓인 방에 불을 땐다. 바로 뒤에 산이고 요즘은 집집마다 나무를 때지 않아서 죽은 나뭇가지가 지천이다. 이모랑 나랑 나뭇가지를 낙엽 줍듯이 주워오면 그게 바로 공짜 연료가 된다. 무쇠 솥 걸어 놓은 아궁이에 30분정도 불을 때면 방바닥이 다음날 오후까지 식지를 않는다. 다음날이면 나무가 또 떨어져 있어서 한 아름 안고 와서 때면 되고…….
저녁은 부침과 상추 푸성귀 쌈이다. 도랑가에서 잘라온 미나리에다가 부추랑 호박 넣고 그 자리에서 부친다. 상추에 쑥갓과 고들빼기를 넣어 밥을 싸 먹으면 쌉싸래하니 밥 한공기가 모자란다. 이주일 동안 고기를 먹지 않았다. 도시에선 고기를 먹어도 몸이 찌부둥하고 의욕이 없었는데 여긴 저절로 기운이 생기고 삶의 의욕이 생기게 된다. 자연 덕분이고 이모 덕분이다.
막내이모는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하는 부지런쟁이다. 종일 청소도 후딱 깔끔, 음식도 후다닥 맛깔스럽게. 닭과 오리도 기르고 있다. 뒷산에 놓아기르는데 오리엄마가 알을 열다섯 개나 품고 있기에 오리가 너무 버거워 보여 다섯 개를 슬쩍 빼냈다. 비 오던 날 이모는 어미오리가 안쓰러워 우산을 씌워 주기도 했다. 앞으로 이십일쯤 되면 금계국 꽃잎 색 닮은 새끼 오리가 엄마를 따라다니겠지. 우리는 오리 새끼를 기다리며 마음이 구름처럼 떠 있다.
밤이 깊어지면 화단에 후레쉬 불을 들고 꽃들의 잠자리를 봐 주고, 냇가 뚝방 길을 걷는다. 냇가엔 반딧불이 별, 하늘엔 진짜 별, 우리는 별처럼 숱한 사연을 반짝반짝 나눈다.
그대는 내게 이런말을 하겠지. \"나는 지금 행복해요. 그대가 오랫동안 기다리고 참아줘서 고마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