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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236

정지용 문학관에서


BY 제르트 2008-05-24

정지용 문학관에서

충북 옥천이란 곳에 그의 생가가 있었다.
그 곳은 생각보다 조촐했고 어쩌면 초라한 느낌마저 주고 있었
다. 근사한 담도 없었고 여늬 문학관처럼 화려하고 고래등 같
은 대문도 없이 그렇게 서 있었다.

멋으로 만들어 놓은 물레방아가 있는 한 쪽에는 초가집 두 채
가 있고, 방안에는 별 것도 없이 그의 시가 쓰여진 액자 몇 개
가 덩그러니 매달려 있었고 마당에는 그의 동상 하나가 겨울바
람을 맞으며 쓸쓸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의 기념관 건물안
으로 들어서니 문 옆에는 사람들이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그의 
모습을 재연한 밀랍인형이 의자에 앉아 있다.
그 옆에 바짝 붙어서 그를 꼭 껴안고 사진을 찍었다. 
그런대로 기분이 좋았다.
 
정지용이 한국에서는 현대시를 가장 먼저 쓴 사람이라고 해도 
잘못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의 시는 그가 살아온 삶이 말해주 듯 변화무쌍한 질곡을 넘
나든 것들이었다.
일본에서는 일본문단에 들어가서 일본어로 시를 썼다고 했다. 
그 몇몇의 일본어 시가 사진 속에 남아 있었다.

해방이 되고는 조선문학연맹이라는 사회주의 문학 단체에 몸담
고 있기도 했다.(혹자는 이름만 올렸을 뿐 활동은 하지 않았다
고도 하고 나중엔 전환했다는 말도 있지만....)
6.25가 일어나고 그는 곧장 좌익계 제자들에 의하여 연행되어 
납북되었다. 서울의 정치보위부에 구금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정인택,김기림,박영희 등과 같이 수용되었다.(김기림이 골수 좌익계였다는 게 놀랍다)
그러다가 평양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이 사실은 납북되었다가 탈출한 계광순의 회고에 의하여 확하
게 밝혀져 있다. 그 당시 이광수,계광순 등 33인이 수감되었다
가 평양감옥이 유엔군의 폭격에 의하여 폭격된 후 정지용은 행
방불명된 것이다. 따라서 정지용은 납북된 것이라고 보아도 틀
린 주장이 아니다.


 그런데 놀랄만한 사실은 그의 두 아들도 월북해서 북한에 살
고 있다는 점이다. 1988년 도엔가 북한에 사는 그의 두 아들들
과 남한에 사는 아들과 딸이 이산가족 상봉 때 만났다는 사실
이다. 그때 북한에 사는 두 아들은 북한에서 자기 아버지(정지
용)를 못봤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들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
면 그는 평양감옥에서 폭격으로 사망한 게 틀림없을 일이다.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정지용은 남한의 거제도 수용소에 있다가 사라졌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정지용의 시가 많은 질곡 속에 쓰여져 이런저런 모습으로 우
리 앞에 서 있듯이 대한민국이라는 얼굴도 그렇듯 여러 모습으
로 바뀌고 변화되어 지금 이런 모습으로 여기 서 있다는 생각
을 하면서 그런건 그런대로 저러건 저런대로 그때의 상황에서 
봐주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맺고 그의 생가와 작별했다.

 

종달새/ 정지용

 

 

삼동내- 얼었다 나온 나를

종달새 지리 지리 지리리......

 

왜 저리 놀려대누.

 

어머니 없이 자란 나를

종달새 지리 지리 지리리......

 

왜 저리 놀려대누.

 

해바른 봄날 한종일 두고

모래톱에서 나 홀로 놀자.


어떤이가 정지용시인은 어머니 없이 자라지도 않았고 특별히 
외롭지도 않은 유년이었는데....\'종달새\'라는 시에서  삼동내라는 표현은 그 시절. 

\'모두가 어렵던 형편을 시인의 눈으로 표현한것 같다\' 고 
평했다. 

그러나 정시인은 아주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었고 그
의 아버지는 이어 후취를 얻어 살았다.

 내가 그의 문학관을 찾은 이유는 단 한 구절 때문이다.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
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돌아오는 길에는 그의 詩歌 <향수> 를  허밍으로 흥얼거리
고 있었다. 

삼동내 [三冬내] [부사]<북한어> 추운 겨울 석 달 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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