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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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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것 사라져도


BY 자운영 2008-01-19

 


                            


친척 아저씨의 부음을 받고 조문을 갔다. 고인에게 국화 한 송이를 올리며 애도하고 상주와 마주앉았다.

 

애통하시겠다는 인사를 해야 하는데 상주들의 얼굴 어디에서도 슬픔이 묻어나지 않는다. 내 집이 아니고 여러 사람 들이 함께 장례를 치르는  장소여서 소리 나지 않게 우는 것이 아닐까하고 둘러보아도 죽음이 안타까워 흐느끼는 소리는 나지 않는다. 근래 들어 조문을 다니는 곳마다 호곡소리를 들어 보지 못했다.

 

  요즘 현대인들의 삶은  점점 편리하게 변해 가고 있다. 대부분 노환이 있거나 지병으로 오랜 병원생활을 해야 하는 부모들은 자식들의 부담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부모가 돌아가신 슬픔보다 고생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래전 첫아이를 낳고 얼마 안 되어 시아버님이 위중하셨다. 아직은 의술이 발달하지 못하던 시절  위암 3기라는 사형선고와 같은 진단이 내려지고 살 수 있는 날이 3개월이었다. 환갑이 막 지나고 접한 아버님의 위중함은 집안을 암울하게 만들었다. 시한부를 조금 넘기고 임종을 하셨다.

 

   조문을 올 손님들이 많아 김치를 담고, 전을 부치고 돼지를 잡았다. 가까운 이웃들은 친척들과 함께 음식 만드는 걸 도왔다.  그렇게 한쪽에선 조문객들에게 줄 음식 준비에 바쁘고 한쪽에선 애통한 곡  소리가 담장을 넘었다.

  칠남매들 모두 출가시키느라 고생만하고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에 어머님의 곡소리는 애달팠다. 스님의 불경소리와 함께 상주들은 밤을 꼬박 새우며 조문객이 올 때 마다 곡을 했다.  애틋한 정이 없는 며느리들은 나오지 않는 억지 울음을 우느라고 곡이 아닌 소리를 내다가 시고모에게 야단을 맞기도 했었다.

  살아있는 자들의 곡소리가 진동할수록 고인의 저승길을 축원한다며 시고모님은 며느리들을 다그쳤다. 그렇게  3일장을 치루기 위해 서울에서 선산이 있는 고향으로 가서 다시 조문을 받았다. 고향사람들의 이별을 끝으로  꽃상여는 한 걸음 한걸음 고인의 영원한  안식처로 떠나갔다.

 

 장례를 치른 뒤에도  삼우제를 지내고 탈상 할 때 까지 보름에 한 번씩 1년 동안 상식을 올렸다.  요즘은 상식을 올리는 집도 거의 없다. 대부분 삼우제를 지내면서 탈상도 함께 한단다.

 

  요즈음의 장례문화는 무척 간편해 졌다. 무엇이든 돈만 주면  가져온다. 어디 그뿐인가 도우미 언니들이 손님들 올 때 마다 음식을 내오고 상주들이 잠시라도 쉴 수 있는 방까지 마련돼 있다. 그 옛날 장례를 치르면서 힘들었던 생각을 하면 참으로 편한 세상이다.

  하지만 옛날이건 현대이건 간에 슬픔은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다. 죽음이 꼭 호상만 있을 것인가 애상도 있을 것이다. 몇 년 전 친정아버지 돌아 가셨을 때 우리 형제들은 슬피 울었었다. 한참은 더 사실 줄 알았던 아버지가 간암으로 병원 생활도중 돌아가시고 난 뒤 지금도 아버지 생각만 하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아무리 세상이 간편해져서 장례식의 번거로움은 점차 사라진다 해도 우리들 마음속에 담겨 있어야할 죽음에 대한 애달픔 마저 사라져 간다면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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