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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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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터


BY jeje 2007-12-13

생채기는 아물게 마련이고 심한 상처를 입어 피가 흘러도 언젠가는 멎고 새살이 돋아 통증을 못 느끼게 되는 게 자연의 이치이다. 그렇지만 부끄러운 기억은 피부의 상처처럼 잘 낫지 않는다. 생각날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 박동이 빨라지며 자신도 모르게 탄식이 터져 나올 때도 있다. 그 탄식에 놀라며 \'창피해 죽겠다\'는 말은 속으로 삼키는 일이 잦아졌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 

 예전에도 부끄러운 일은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갓 발령받은 처녀 선생님이 담임이 되셨는데 방금 순정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예뻤다. 피부는 눈처럼 하얗고, 몸은 가녀리고, 머릿결은 눈부셨고, 목소리도 어찌나 낭랑하시던지……. 선생님을 그토록 좋아하기는 처음이었다. 선생님께 잘 보이고 싶어 반장 선거에도 나갔고, 선생님의 담당 과목인 사회는 예습과 복습을 꼭 했고, 질문에 가장 먼저 대답하기 위해 \"저요!\" 하며 손을 드는 연습까지 했었다. 환경 미화를 위해 나머지공부도 아닌 나머지청소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 선생님이 좋았다.

 하지만 푸른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지기도 하는 게 인생사다. 6월로 접어들던 때에 선생님은 이별을 말하셨다. 원래 선생님의 전공은 특수교육이라 특수학교로 발령을 받으셔야 했는데 빈자리가 없어 임시로 우리 학교로 배정을 받으셨던 거다. 그런데 이제 자리가 나서 그 학교로 가신다고 했다. 그 소식에 눈물이 비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훌쩍거리는 친구들 사이에서 난 가장 서럽게 울었다. 특수학교 교사로 근무하시겠다는 선생님의 희생정신까지 더해져서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과 사모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졌다. 선생님께 편지까지 썼다. 이다음에 선생님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평생 잊지 못할 거라고, 그리고 다른 담임선생님은 절대 좋아하지 않겠다는 말도 썼다. 선생님도 떠나시며 끝내 눈물을 보이셨다. 그때까지 내가 경험한 가장 큰 슬픔이었고, 슬픔으로 가슴에 구멍이 난다는 말이 진짜라고 실감하며 많이 울었다. 

 선생님이 떠나신 후 예쁘지 않은 여자 선생님이 오셔서 담임을 맡으셨다. 담당 과목은 국사라고 했다. 어린 마음에 국사 선생님이 오지 않으셨다면 이쁜 담임선생님이 떠나지 않으셨을 거라는 미움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 당연히 새 담임선생님이 아니꼬울 수밖에.

 \"저 선생님은 피부가 엉망이야. 딸기처럼 구멍이 뻥뻥 난 코는 처음 봐. 코가 왜 저래? 목소리도 마음에 안 들어. 칠판에 글씨 연습하려고 수업하나 봐. 무슨 판서를 저렇게 많이 해?\"

 투덜이 스머프처럼 선생님의 있는 흉, 없는 흉을 다 찾아내어 투덜거리며 지냈는데 그 선생님은 유독 나를 귀여워하셨다. 가끔 명절 때나 내려오던 무릎 팍에 뉘여 놓고 귀지를 파주던 큰언니처럼 그렇게 다정한 느낌으로 다가오셨다. 고양이의 발톱처럼 날카롭게 세웠던 경계심과 미움이 눈처럼 녹아내릴 것 같았다. 고민스러웠다. 다른 담임선생님을 절대로 좋아하지 않겠다던 예전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야.\"

 선생님이 강요하신 것도 아니고 내가 그러겠다고 편지를 써 놓고 새 담임선생님을 금방 좋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건 엄연히 배신 행위였으니까. 하지만 난… 나는… 마음속의 배신행위를 하고야 말았다. 담임선생님이 좋아져 버렸다. 그리고 후회했다. 좋아하는 마음이 생겨버린 것에 대한 후회가 아니었다.

 \"아, 어쩌자고 그런 편지를 쓴 거냐고!\"

 이런 후회였다.^^;; 제발 그 편지가 예전 선생님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후회로 세상을 사는 지혜 하나를 배웠다. 절대로 호언장담하지 말라는 것! 청천에 벽력이 떨어질 수도 있으니,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요상하여 풍랑처럼 이리저리 출렁거리므로 절대로 큰소리치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벌써 20년 전의 일이지만 그 편지를 떠올릴 때마다 부끄러운 건 사실이다. 어린 나이였지만 분명 경솔했었으니까. 

 얼마 전에 저지른 부끄러운 짓은 회사를 입사하면서 벌어졌다. 5년 남짓한 전업주부로서의 길을 벗어던지고 제 3의 인생을 설계하자는 포부를 안고 취업을 했다. 회사에서 만난 선배 직장 동료도 모두 좋고 정이 갔다. 모두들 내가 회사에서 주목받는 인재로 커나갈 거라고들 말을 했다. 그리고 나 또한 그렇게 믿으며 수습 3개월을 무사히 마쳤다. 

 회사 생활과 주부로서의 생활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문제의 중심에는 아이가 있었다. 회사를 다니며 시부모님께 맡긴 네 살난 막둥이 녀석이 엄마가 그리워 병이 난 거다. 주말마다 헤어질 때면 아이는 가지 말라고 통곡을 했다. 돈 벌지 말라고, 회사 가지 말라고 애원을 하고, 주말에 같이 잘 때면 몇 번이나 깨서 내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을 하고 다시 잠이 드는 아이……. 아이를 생각하면 못되고 독한 엄마인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커져갔다. 그러다가 우연히 보게 된 구인광고. 지금 다니는 회사보다 훨씬 좋은 조건이라 덜컥 이력서를 내고 말았다. 시댁과도 가깝고 근무 시간이 환상적이었다. 

 면접을 보라는 연락이 왔다. 회사에는 일이 생겨서  오후 출근을 하겠다고 통보를 하고 면접을 보러 갔다. 2차 심층 면접에는 아이가 아프다는 핑계를 댔다. 경쟁률이 높아 낙방할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합격을 했다. 그런데 그날 오후부터 신입사원 교육을 받으라는 통보를 받았다. 지금 근무하는 회사는 인수인계가 짧아야 한 달 정도인데 무단결근을 하면 회사에 끼치게 되는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터. 회사로 가자니 합격한 회사의 복지 혜택이나 오후 5시 정시 퇴근이라는 유혹이 너무 강했다. 시부모님께 상의를 했더니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다니던 회사를 정리하라고 하셨다. 두 시간이 넘게 갈팡질팡 하다가 욕 한 번 먹고 끝내리라 결심했다. 그리고 무책임하고 경우 없고 몹쓸 아줌마로 낙인이 찍혀서 갓 입사한 회사를 정리했다. 

 \"아, 부끄러워 죽겠다!\"

 아이는 지금 행복해하고 있다. 밤에 깨어서 우는 일도 줄어들고 점점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다. 엄마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나\'라는 또 다른 자아는 수치스러움과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나를 믿고 인정해 준 사람들이 느꼈을 실망감에 죄의식은 커져만 가고, 평생을 함께 할 인연이라고 생각했는데 스스로 등을 돌려버린 사실에 자기모멸감은 최대치에 이르렀다. 너무나 죄송한 마음에 나중에라도 이 죄송함을 갚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회사 상사는 \"어떻게요? 어떻게 갚을 건데요?\" 하면서 화를 냈다. 

 \'이런 게 인생인 건가?\'

 무책임한 내 결단은 내가 죽을 때까지 기억 속에서 심한 흉터로 남을 것이다. 흔적도 없이 상처가 아무는 것처럼 나의 이 잘못도 지워질 수 있을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들 나를 좋은 사람으로 기억해 주는 삶을 살고 싶었는데, 왜 나는 이런 결단을 해야 하는 삶을 사는지 모르겠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겠다고 호언장담하는 게 얼마나 경솔한 짓인지 알고 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일이 다시는 없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것 밖에. 이렇게 나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다. 흉터로 남을 부끄러운 상처이지만 아물게 하느라 시어머니의 위로의 말을 오늘도 곱씹고 있다.

 \"엄마란 그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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