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우회가 열리는 운동장 입구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버스들로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각 면을 알리는 현수막이 내걸리고 장기자랑이 한창이다. 고흥군 전체가 해마다 효창운동장에서 축제를 열고 있었다. 우리 동네 현수막이 걸린 장소로 찾아 가는 동안 여기저기 들려오는 남도 특유의 사투리는 고향에 온 듯 정겹다.
잠시 인사만 하고 나올 생각이었는데 여러 가지 향토음식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자리를 잡고 앉아 입으로는 먹고 눈으로는 혹시 아는 이가 있을까 둘러보았다. 저만치 친구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간단하게 반갑다는 말이라도 건네야 하는데 낮이 선 사람마냥 멀게 느껴진다. 결국 그 친구가 나를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운동장을 나오고 말았다.
또래가 몇 안 되었던 작은 섬에 담장을 사이에 두고 소꿉친구가 있었다. 그 애와 나는 가는 곳마다 함께 다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친구가 먼저 떠나고 잠시 헤어졌다가 나도 양재를 배워서 서울로 올라와 재회를 했었다.
우리는 다시 헤어지면 안 되는 것처럼 어디를 가도 같이 다니다 내가 먼저 결혼을 했었다. 둘째를 임신하고 만삭으로 새벽녘 까지 잠을 이루지 못 하고 뒤척이는데 옆에 누워 자던 남편이 갑자기 “미스 리” 하면서 내손 목을 잡고 잠꼬대를 하더니 이내 등을 돌리고 자버렸다. 아침에 출근 하는 남편에게
“오늘 미스 리 만나요?”
했더니 흠칫 놀라는 표정으로 나가버렸다. 그날 밤 늦게 귀가한 남편은 내 친구가 밖에서 만나자고 했다 한다. 건설회사에 다니고 있던 터라 술자리가 잦아 어느 술집 접대부이려니 하고 농을 했는데 친구였던 것이다. 올 때 마다 퇴근 무렵 찾아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깊은 내막을 알고 나면 배신으로 인해 내가 받을 상처가 두려워 더 이상 따져 묻지 못하고 시간이 해결해 주길 바라면서 가슴에 묻고 살았다. 뒤에 친구가 결혼을 해서 외국으로 나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무렵 남편은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하다 3년 만에 파산을 하고 여기저기 빚을 지고 생활은 엉망이 되어 허덕이고 있었다.
친구 오빠로부터 동생이 한국으로 나왔는데 내가 보고 싶어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그때 까지도 변변한 친구 하나 없던 차에 이제는 결혼도 했으니 지나간 일은 묻어 버리고 옛날의 다정했던 사이로 돌아가야지……“ 팔러 다니던 옷가지를 들고 찾아갔다. 점심때가 지나도록 한참이나 자랑이 늘어지더니 미수가루 한잔을 타주었다. 이때다 싶어 옷 보따리를 폈다. 친구는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옷을 넘기면서 콧소리를 냈다.
“응 나는 이런 것은 안 입고 시골에 있는 시누이에게나 사줄까?
내 얼굴은 홍당무로 달아올랐다. 외제 냉장고 안의 바나나를 보란 듯이 열었다 닫았다 반복하던 친구는 딸아이에게 우유를 먹이고 손수건으로 닦아주며
“네 아들은 참 더럽게 컸지?”
의기양양 쳐다보는 순간 나는 가슴에 묻어 놓고있던 불미스런 일을 꺼내고 말았다. 하지만 친구는
“무슨 소리 하는 거니? 네 남편이 사랑하면 안 되느냐고 해서 안 된다고 했어”
더 는 깊이 알면 안 되는 일들이 뭉글뭉글 가슴속에 응어리지고 있었다. 어렵던 시절 갈 곳이 없어 신혼 방에서 까지 잠을 재워 주고 음식점에 시켜서라도 끼니때 먹고 가게 했던 친구는 내 곁에 없고 오직 우월감이 가득찬 이기심만 내 곁에 있었다. 개구쟁이 큰아들은 자주 옷을 갈아입혀도 어느새 더렵혀져 있었다. 살림만 하는 엄마들처럼 아이에게만 매달려 있을 수 없던 시절이었다.
장난꾸러기 큰아들의 혼인날을 받아 놓고 친구에게 화해와 용서를 하고 그 사랑이 아들에게 축복으로 돌려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었다. 하지만 큰아들 결혼식에도 작은 아들 결혼식에도 오지 않았다.
이제 작은 섬 바닷가에서 조개껍질을 주어모아 소꿉놀이하던 그 동무는 세속에 잃어 버렸다. 긴 세월 동안 가슴에 맺혀있던 응어리도 내 힘든 여정이 끝나면서 사라지고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친구를 보는 순간 외면을 하고 향우회가 한창인 운동장을 나와 전철역으로 터벅터벅 걷는 동안 떨어진 낙엽처럼 빛바랜 추억들만 난무하고 먼저 다가가 다정한 말이라도 건네지 못한 내안의 바보는 후회와 연민이 교차하는 쓸쓸한 하루를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