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강원도에 있던 큰 딸이 내려왔다.
수업이 없어서 다니러 왔노라고 하곤 엄마아빠께 꼭 드릴 말씀이
있단다.
평소에 말 수가 그리 많지 않던 아이라 무슨 일인가 조금 궁금해서
엄마한테 먼저 하라고 해도 같이 드릴 말씀이라고만 하고 뜸을 들
인다.
집에 온 첫째날은 그냥 아무 말도 않고 지내고 둘째 날에 그것도
밤이 늦어서 거실로 불러 내더니
\"저 내년에 1년 동안 휴학 할려고 해요.\"
이 무슨 일인가 우리 부부는 뜨악한 표정으로 아이만 쳐다보는데
수능을 치르고 집에 와 있던 둘째는 미리 알고 있었던 눈치다.
나는 놀라서 아무 말을 못하고 있는데 남편은
\"갑자기 무슨 휴학? 이유가 뭐냐?\"
아이는 남편 앞에서는 평소에는 잘 지내다가도 무슨 일을 보고 해
야 할 때는 많이 주눅이 드는 편이라 미리 종이에 왜 휴학을 해야
만 하는지를 깨알 같이 적어서 보고를 한다.
\"1년 동안 휴학하면서 열심히 사회 경험도 해 보고 돈도 착실히 벌
어서 나머지 4학년의 등록금은 스스로 해결하고 싶고, 여유를 만
들어서 1개월 정도 유럽 베낭 여행을 가고 싶어요\"
중간에 한번도 어떤 기미를 보이지 않던 아이가 하는 말 치고는 상
당히 준비된 이야기에 나는 아니? 하는 눈치만 보이는데 남편은
\"안돼! 일단 졸업은 하고 사회 경험을 해도 되는거니까 등록금 걱
정 말고 정식 졸업장을 쥐고 사회에 나가라.\"
둘째가 이번에 수능을 쳤으니 제 딴에는 가정형편을 생각해서 고
민을 했는가 싶어 아이를 말렸다.
그래도 아이는
\"졸업을 하면 아르바이트 자리 구하기도 어렵고 졸업생은 업소에
서 쉽게 자리를 안 주거나 급료가 세지니까 꺼린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졸업을 하고 직장이 쉽게 안 구해지면 백수가 되지만 휴학
생은 아직 학생의 신분이니까 백수는 아니잖아요.\"
나름데로 자구책을 마련해서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둘째는 옆에서 언니의 편을 드는데
\"아빠! 요즘은 8학기에 졸업 안하고 10학기에 졸업들 많이 해요.
유럽이나 다른 나라 어학 연수도 학생 때 가면 유리 하고요.\"
일리가 있는 듯도 하다.
\"그러면 결혼은 나중으로 미루는거네?\"
남자 쪽에서 내년에 결혼하잔다고 큰애도 그런다더니 이제는 휴학
에 해외 여행까지 계획하면....
\"너무 경험도 없이 결혼하자니 겁도 나고 결혼 전에 풍부한 경험을
해 보고 졸업 후에 2~3년 있다가 할 예정이예요.\"
전에는 그렇게 타일러도 막무가네더니 철이 좀 드나 보다.
같은 학교 친구들도 너무 일찍가면 후회하고 시집이라는 굴레가생기면 자유가 많이 박탈 당할거라고 압력을 넣었단다
큰애도 이리저리 생각해 본 결과 그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더란다
.
혼자서 직장을 구하고 스스로 4학년의 등록금도 마련하고 여행도
하면서 자기 자신의 능력을 알아보고 싶어 하는 큰애가 걱정은 되
지만 나는 찬성하는 쪽으로 이야기를 이끄는데 남편은
\"일단 졸업은 하고 보자.만약 그러다가 어영부영 졸업도 못하고 어
중이 떠중이 대학생이 되면 뭐 할래?\"
단호하게 나온다.
아이는 남편의 과감한 반대의사에 자꾸 주눅이 들어 말까지 더듬
고 둘째는 옆에서 조그맣게 꽁알꽁알 언니 편을 든다.
평소에는 다정다감하고 유머도 많은 남편은 아이들의 일에는 지나
칠 정도로 엄한 편이다 보니 둘째처럼 맹랑하지 못한 어수룩한 큰
애는 늘 아빠 앞에서는 조심스럽다.
그래도 아이의 눈빛이 간절한 것을 본 나는
\"언제부터 휴학할 생각을 했어?\"
부드럽게 물으니 벌써 오래 전에 계획한 일이었는데 겨울이 되어
내년 학기에 휴학을 감행하려고 한단다.
둘째가 내년에 대학에 진학한다고 저한테 등록금 걱정을 시키지
않았건만 큰애는 제 앞가림을 하겠다니 기뻐해야 할 일인지 그만
두라고 말려야 하는지....
큰애는 국립대를 가 주고 가끔 장학금까지 타는 기특함도 보태서
200만원도 못 되는 등록금으로 3학년까지 지낼 수 있어서 많이 수
월했는데 둘째는 기어이 사립대에 가겠단다.
성적이 국립대가 되더라도 사립대에 가겠다니 안된다고 하기도 그
렇고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는 사립대에 있다니 어쩌지도 못하
고....
수능을 치기전에 모의고사 때 거의 1~2등급에 실수로 3~4등급도
가끔 받던 아이가 수능 당일에 외국어를 망치고 펑펑 울고 집에 왔
다.
기숙사에서 과외도 안하고 수리성적이 2등급이면 아주 잘한 거라
고 큰애가 일러 줘서 아는 엄마니 나는 어쩔꼬?
외국어는 평소에 1~2등급을 받던 아이가 아무리 해도 이번에는 3
등급이 될 것 같다고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집으로 왔을 때 나
도 같이 아이를 끌어 안고 울고야 말았다.
오기도 언니보다 많고 자존심도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둘째는 기어
이 사립대에 가서 잘 할테니 보내 주란다.
나중에 졸업하고 다 갚아 주겠노라고.
그래서 큰애가 휴학을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한번도 저한테는 등록금이 어떻고 생활비가 어떻고 얘기 한 적이
없건만 눈치로 동생과 저의 등록금 때문에 힘들어 할 부모를 생각
해서 스스로 휴학과 결혼까지도 미룬다.
남편의 완강한 반대로 얘기의 진전이 없을 것 같아서 일단 자고 내
일 다시 얘기하자고 해산.
잠자리에 든 남편에게 큰애가 영 어린애가 아닌 것 같다고 어찌 할
예정이냐고 물으니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일리가 있는 얘기더라고. 사회경험도 하고
자력으로 등록금 마련과 해외 여행도 하고 픈 모양이니 한번 믿어
봅시다.\"
순순히 긍정을 한다.
이튿날에 아이는 강원도에 도로 올라가고 신중히 준비하고 휴학을
결정하라고 당부하는 전화를 했다.
어떤 결정을 하든 존중해 주마고는 했지만 걱정은 된다.
워낙에 아이가 어리버리 해서(친구들은 야물딱지다고만 하는데 나
와 남편은 영 어리버리) 걱정인데 언제 저 만큼 컸을까?
여러가지 고민이 많을 아이가 대견하기도 하지만 안스럽기도 하
다.
어릴 때 부터 늘 바쁜 엄마아빠 때문에 동생들 건사하느라 애 어
른이 되었던 큰애가 오늘따라 짠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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