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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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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기


BY 개망초꽃 2007-11-09

몇 달 전부터 세탁기에서 탈곡기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며칠 전 숨소리가 멈추고 조용해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세탁 도중 물이 빠지다가 멈추어 버리더니 영영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스위치를 껐다가 다시 켜고 단추란 단추는 모두 눌러 봐도 팅팅 소리만 날뿐 세탁기는 제 명을 다해 돌아가신 것 같았다.


14년을 한 집에서 살았던 세탁기는 여고시절 교복색인 짙은 권색이다. 일산 신도시로 내 집을 분양 받고 일 년 뒤에 교복색 세탁기로 바꾸게 되었다. 세탁기는 힘차고 씩씩하게 돌고 돌아 이불부터 자질구레한 팬티까지 잘도 빨아주었다. 힘센 세탁기가 생기고부터 손빨래는 거의 한 적이 없었다. 니트나 와이셔츠는 세탁 망에 넣어 빨았고 브라자도 브라자 전용망에 넣었다.


교복색 세탁기를 구입했을 때 딸아이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고 아들아이는 두 살이었다. 두 아이의 흙먼지 묻은 바지를 털어주고 땀에 젖은 속옷을 향기나게 빨아주던 세탁기가 14살이 되면서 딸아이는 생머리 나풀거리는 성인이 되고 아들아이는 중학생이고 삼십 중반이던 나는 잔주름 많은 사십 후반으로 접어들었다.


처음 세탁기가 자리 잡은 곳은 작은방에 딸린 다용도실이었다. 한 평도 안 된 곳이었지만 그 곳은 세탁기만의 공간이었다. 세탁기는 자기만의 방에서 행복했었다고 믿는다. 그 방엔 작고 길쭉한 창문이 있어서 공기는 항상 쾌적했고, 하얀 타일이 깔려 있어서 시각적으로 넓어 보였다. 겨울엔 얼굴 쪽과 발끝은 시렸지만 동상에는 걸리지 않았다. 그 전에 있던 크림색 세탁기는 연립주택 베란다에서 살아서 머리 쪽과 발이 얼어 뜨거운 물로 녹인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좁지만 쾌적하고 하얀 타일이 깔려 있던 그 곳엔 업둥이 고양이를 키운 적이 있었고, 꼬리에 상처가 있었던 친척집에서 얻어온 강아지도 살았었다. 업둥이 고양이는 잃어버리고 강아지는 다른 집으로 보내졌지만 세탁기만은 그 방 주인이 되어 구년을 살았다.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으며 세탁기에게도 위기가 있었다.  친정으로 들어오면서 세탁기를 버리려고 했었다. 그러다가 엄마네 창고 옆 구석으로 옮겨와서는 온갖 수모를 겪어야했다. 창고에서 물건을 꺼내면서 가끔씩 세탁기 위로 물건이 떨어지면 친정엄마는 세탁기 때문에 불편하다고 잔소리와 구박은 그나마 참을만했다. 그렇게 이년을 견디었는데 큰 동생이 중국에서 하얀색 고양이를 들이고부터 세탁기는 자신의 잘못도 없이 욕을 바가지고 먹어야 했다. 이놈의 고양이가 말썽을 부리고 할머니를 피해 세탁기 위에 올라가면 친정엄마는 회초리로 냅다 고양이를 치면서 세탁기 탓을 했다. 세탁기도 보기 싫고 고양이도 보기 싫다고 다 내다 버려야겠다고 했다. 나와 세탁기는 발가락에 쥐가 나도록 힘을 주고 버텼다. 세탁기를 다시 사려면 몇 십만 원은 줘야 한다고 했고, 워낙 튼튼해서 고장 나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그렇게 삼년을 엄마네 창고에서 구박댕이로 살다가 집을 사서 분리되던 날, 세탁기를 설치하고 스위치를 꼭 누르니 세탁기는 힘차고 씩씩하게 빙글빙글 춤을 추었다.

나는 편안하게 세탁기를 의존했다. 세탁기가 있으면 빨래가 겁나지 않았다. 이불도 꾸역꾸역 집어넣고, 소파 겉싸개도 훌럭 벗겼다. 딸아이가 기숙사에서 한 달 동안 미뤘던 빨래도 휙휙 잘도 돌려주었다. 아들아이 운동화도 끈을 풀어 털컥 넣었고, 가방도 휙 던져 넣었다. 젖싸개도 방정맞게 맡겼고, 속옷도 헤프게 보여주었다. 걸레도 질경질경 빨았다.

그러던 것이 읍 소리도 악 소리도 없이 조용히 생명을 다했다.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세탁기는, 죽는자는 말이 없다더니 너무너무 조용하다.


우연히, 정말 절묘하게 우연히 홈쇼핑에서 세탁기 광고를 보게 되었다. 은빛이 감도는 세탁기는 한눈으로 봐도 아름답고 멋스러웠다. 드럼세탁기가 훨씬 아름답고 멋스럽지만 가격을 비교하니 안 되겠고 우리 집엔 드럼 세탁기가 안 어울릴 것 같아서 통세탁기로 결정을 했다. 가격도 저렴하고 일시불은 깎아주고 자동주문은 이만 원이나 싸다. 앗싸~~ 이거다. 바로 전화기를 들었다. 홈쇼핑을 보고 처음 해보는 거라서 두 번 실수를 하다가 제대로 주문을 넣었다.

수화기 저쪽에서 기계음이 들리면 긴장이 되어 손가락이 떨리고 입을 꼭 다물고 정신을 집중하느라 피곤하다. 길치와 기계치인 나 같은 사람이 살기 갑갑한 시절이다. 자동응답기가 그런다 열흘 후에 배달이 된다고…….


오늘은 손빨래를 했다. 가루세제와 표백제를 뜨듯한 물에 풀어서 빨랫감을 넣었다. 큰 빨래는 미뤄두었지만 속옷과 양말은 미룰 수가 없었다. 부엌에서 쓰는 고무장갑을 끼고 화장실 바닥에 빨래를 치댔다. 요즘 세재는 거품이 안 난다. 어디선가 얻은 빨래비누도 마찬가지로 거품이 안 난다. 빨아지겠지 하고 몇 번 주무르다가 헹궜다. 찌든 때가 아니니 괜찮겠지 했다. 큰 빨래는 화장실 한쪽에 쌓여있다. 세탁기가 오면 빨아야지 하면서 자꾸 눈에 거슬린다. 다음 주에 세탁기가 온다니 내일이라도 마저 빨아야 할 것 같다.


기계로 인해 여자들은 많이 편해졌다. 세탁기가 없었다면 빨래에 깔려 숨쉬기가 편하지 않을

것이다. 수건과 속옷과 양말이 며칠 사이 빨래 통으로 가득 찼다. 유년시절엔 도랑이나 냇가

에서 빨래를 했고, 겨울엔 얼음을 깨고 불을 피워 물을 데워가며 했다. 내가 결혼을 할 때도

세탁기는 필수품이 아니었다. 음식 하는 것보다도 빨래하는 것이 지겹고 힘들었다. 첫애를

낳고부터 집집마다 세탁기를 샀다. 빨래하는 곳과 탈수하는 곳이 분리된 통이 두 개였던 세

탁기를 쓰면서 여자들은 빨래에서 벗어났지만 나이 드신 분들은 그래도 손세탁을 고집 했었

다.


 

컴퓨터가 집집마다 깔리고 투 도어 냉장고가 부엌을 장식하고 얄팍한 텔레비전이 벽면을 차

지하는 시대, 싱크대 밑엔 드럼 세탁기와 식기세척기가 한자리를 차지하는 세련되고 멋스러

운 시대, 청소기가 자동으로 돌아가는 시대, 와이셔츠를 세탁소에 맡겨도 흉보지 않는 시대,

다리미질도 저렴하게 너도 나도 맡기는 시대, 나는 지금 편하고 깔끔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근데 왜 많은 주부들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는 걸까? 근데

왜 나는 힘들다는 소리를 툭하면 내뱉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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