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992

나도 이혼한 적 있었다


BY 그대향기 2007-10-27

벌써 17년이나 지난 옛날 이야기지만 지금도 가슴이 아프고 억울했던 사건이다.

직업군인을 그만두고 제대 할 무렵에는 다섯살과 막 100일이 지난 두 딸을 데리고

부산의 시댁으로 아버님의 사업을 동업하기 위해 들어갔다.

부산에는 항구도시답게 배와 관련된 일거리가 많았고 아버님도 폐그물에서 재활용품을

골라내는 꽤 수입이 짭짤한 사업으로 남편과 소규모지만 수입이 되는 사업을 하셨다.

영도 동삼동에 허름하지만 공장도 가동하면서 사업이 발전하면서 공장의 규모를 넓힐 정도로 성장했고 대저동으로 규모를 넓히면서, 때 마침 오랜 통신국장의 직책으로 외항선원생활을 마감하신 시아주버님도 영입하는 사업이 된다.

신제품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지만 재가공으로 새로운 물건으로 가공만하면 사용하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던 재활용품은 물건이 딸릴 정도로 많이 팔렸고 수입의 세 몫을 나누어도

살림이 넉넉할 정도로 순탄한 사업이었다.

처음부터 윗동서는 부산이 시골이라고 시숙과는 따로 살았었고 시숙의 식사와 빨래를 내가

해야하는 힘든 생활이다보니 두 딸과 그 무렵 세째의 임신으로 많이 힘든 상황이었다.

어쩌다가 서울에서 공장을 방문해도 시숙의 밥걱정은 의례 내가 하는 걸로만 아는 동서와의

갈등과 시숙의 반찬에 조금의 소홀함이 보일라 치면 남편의 심기는 매우 불편했다.

부근에 사설 식당이 흔치 않던 당시의 대저동에서 두딸의 손을 잡고 임신한 배를 안고 3km를 걸어서 버스를 타고 구포시장을 이 구석 저 골목을 누벼 봉지봉지 장을 봐서는 또 버스에

서 내려 3km를 이고지고 올라와서 반찬을 준비하고 오토바이에 아이들을 태우고 밥을 해다

나르는 생활은 나를 적당히 지치게 했고 불러오는 배가 더욱 나를 힘들게 할 무렵,

수입자유화가 되면서 외국에서 원자재가 재활용보다 더 싸게 공급되는 희안한 사태가

발생하고야 말았다.

날마다 수입은 줄어들고 재고는 쌓이고 받아놓은 물건을 폐기처분해야 하는 엄청난 사건이

터지고야 만다.

그냥 망하는 게 아니고 물건을 폐기처분하는데에도 엄청난 비용이 드는 웃지 못할 슬픈현실은 남편을 더욱 예민하게 했고 시숙의 시중에 내가 헛점이 보인다며 짜증을 내는 남편과 대판으로 싸우는 일이 생긴다.

기울어져 가는 사업도 중요하지만 전적으로 남편의 말만 듣고 배에서 내리면서 수입전부를

이 사업에 쏟아 부은 시숙의 앞날을 걱정하다 남편의 신경은 날이 갈 수록 날카롭다 못해

한숨과 끼니를 거르면서 하는 경제부흥책이 밥을 대신할 정도였다.

그래도 끼니 때 마다 시숙의 눈치가 안보이게 웃는 얼굴로 식사시간을 알리고 고기토막 하나라도 시숙그릇에는 더 큰 걸로 올리는 노력을 보였지만 남편의 불편한 심기에는 내가 하는

친절로는 만족하지 않은 부분이 걸리는 걸 어쩌지 못했다.

시숙을 무시한다는 남편의 말이 내게는 폭탄과 같은 발언이었고 나는 하노라고 했지만

현실이 어렵다 보니 어쩔수 없는 사태로 받아 들이자하는 내 말은 남편의 귀를 만족하게

못한 듯 했다.

동서 없이 꼬맹이들 데리고 임신한 몸으로 하노라고 했지만 어쩌겠냐고 하면서도 화가 났다.

사업이 망하면서 우리만 어려워진게 아니라 아버님, 시숙까지 어려워지니 남편의 자존심은

땅을 파고 내려가 지하까지 곤두박질했고 서너개나 되던 꽤 많던 통장의 돈은 다 어디로가고

빚만 남아 세상을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은 온통 부정 투성이었다.

아이들을 생각하면 싸우면 안되지만 싸움이 일단 터지고 나니까 그 동안 참았던 여러가지 불만들이 폭발했고 서로 못할 말도 거침없이 해 버리는 악순환의 연속이다가 힘은 부치고

화풀이는 할 곳이 없던 나는 옆에 있던 전화기를 남편을 향해 힘대로 던졌다.

방어할 틈도 없이 당한 남편의 뒷통수에서는 피가 흘렀고 순간 당황한 남편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멍 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 보다가 아무말을 못한다.

순하던 집사람이 갑자기 돌변한 모습이 어이없고 피가 나는 머리가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싶은지 한 동안 눈만 꿈뻑꿈뻑 하더니

\"미쳤구만\"

그 말만 한다.

나는 순간적인 살의를 느낀 듯도 했다.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사태 파악이 잘 안되고 아이들이 위험할까 두 딸을 품에 안고 떨고만 있었는데 다행히 남편은 집을 나갔고 그 날밤 늦게야 들어와서 조용히 잠이 들었다.

밤새 불안과 후회가 잠을 멀리 떠나게 했지만 조용한 남편이 오히려 무섭기도 했다.

아침이 어떻게 왔는가 싶게 밥을 해서 남편을 주고 집을 대충정리 한 다음에 간단한 가방을 꾸려 아이들과 나는 쪽지 한장 남기지 않고 울진에 있는 오랜친구 집에 피정을 갔다.

이렇게는 살 수 없다.

하느라고 하고 대접을 못 받느니 끝내리라.

아이들은 내가 키우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이대로 종지부를 찍으리라.

아무것도 모르는 두딸은 여행이 그저 좋기만 하다.

과자나 뽀시락 먹고 차창으로 지나는 여러가지 풍경에 신이 났다.

두아이와 부른 배를 안고 소식도 없이 불쑥 찾아든 친구에게 무슨 말로 위안을 할까 ?

울진의 친구는 무조건 잘 했다고 하고 온천으로 맛있는 음식점으로 극진한 대접을 한다.

서점과 유명메이크 신발가게를 하던 그 친구는 경리 아가씨에게 모든 걸 맡기고 내게만

정성을 쏟는다.

이틀이 지나니 눈치가 보여서 고맙단 말을 하고 어디로 갈거냔 질문에는 집에는 안 간다고 못 박고 포항을 향하는 버스에 아이들을 태운다.

남편친구의 아낸데 이혼을 하고 혼자 사는 친구 집으로 짐을 나르 듯 아이들과 다다른다.

놀라는 친구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평소의 다정다감했던 남편을 기억하던 친구는 며칠 쉬다가 그냥 집으로 들어 가란다.

이혼하고 나니 혼자사는 여자가 느끼는 자괴감과 허전함, 함부로 바라보는 기분 나쁜 시선이 괴롭다고....

그래도 그 때까지 남편한테 단 한번의 통화도 없이 이 번에는 이대로는 안 들어 간다고 벼른다고 하니 기분이 풀릴 때 까지만 하고 들어가란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뽑아무는 담배!

나는 실망하고야 만다.

담배에 실망하는게 아니고 이혼하고도 당당하지 못한 친구의 쓸쓸한 옆 모습에서 여자의

 아이가 보이고 두고 나온 아이에 대한 그리움이 보였다.

하룻밤을 자고 친정에 전화했더니 발칵 뒤집혔다고 두아이와 임신한 몸으로 사흘이나 행방불명된 딸이 살아서 전화를 했더니 오빠가 어디냐고 몸은 괜찮냐고?

혹시라도 나쁜 생각을 했을까봐 한꺼번에 질문이 전화선을 타고 무너지 듯 흘러나왔다.

아무일 없고 남편한테서는 어떤 반응인지가 궁금해서 물었더니 내게서 연락이 오면

꼭 집으로 돌아오라고 집에서 얘기하자고 신신당부를 하더란다.

어쩔까?

여기서 끝내?

아직 형편이 나아진건 아닌데 또 반복되면?

여러가지를 생각하다가 남편과의 사이가 나빠서 이혼을 생각하는게 아니고 시댁과의 문제인 것을 어이없게도 내가 왜?

너무 바보 같다는 생각에 그 밤은 친구집에서 그대로 자고 이튿날 남편이 있는 대저동으로 긴 여행의 종지부를 찍는다.

돌아오는 길은 두려움보다는 시댁을 너무 생각하는 효자 남편을 내가 이해 못하면 누가 하랴 싶어서 오히려 남편이 사랑스럽고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오니 난장판인 채로 남편은 일하러 가고 없고 빈 냄비마다 라면가락이 말라 붙어서

얼마나 굶식을 했는가 증명해 주는 듯 했다.

주섬주섬 집을 챙기고 장 봐 간 찬거리로 반찬을 해서 저녁을 기다리는데 저벅저벅!

골목을 들어서는 낯 익은 남편의 발자욱소리!

연애할 때 처럼 가슴이 설래고 얼굴이 붉어진다.

아이들이 먼저 뛰어나가 아빠 품에 안기고 두딸을 꼬옥 안은 남편은 한참을 움직이지 않는다.

충분히 아빠냄새를 맡은 아이들이 물러나고 남편이 일어나면서 물기어린 눈빛으로 배 부른 나를 바라보며 두 팔을 활짝 벌린다.

뛰는 가슴의 고동소리가 귀로도 들릴 만큼 우리는 그렇게 뜨겁게 포옹을 하고 아주아주

오랫동안 말없이 서로를 느끼고만 있었다.

\"사랑해\"

\"미안하고 다신 그러지 않도록 노력할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똑 같은 말을 했던 것 같다.

그 후에 사업은 극도로 악화되고 빚은 많이 늘었어도 우리는 기쁘게 하루하루를 맞이 했고

폐기처분하면서도 많이 힘들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청산이 되었고 시숙은 그 뒤에 결국

별거에 들어가게 된다.

지금도 별거중!

우리는 그 위험한 때를 잠시 떨어져 있으면서 서로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며 사랑을

확인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지만 만약 그대로 이혼을 강행했더라면 지금의 아이들과 우리는

없을 것이리라.

마음으로 했던 이혼이지만 남편의 마음은 지금도 아찔하단다.

그 배에 들었던 아이가 아들이고 멋지게 크고 있으니까.

오늘도 큰 딸의 남자친구와 비슬산에서 외식을 하면서 지금의 행복이 값진 것은 그 때를 잘 이긴 우리의 사랑이 고맙게만 여겨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