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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붉은 포도주 반잔을 따라 놓았다. 적포도주엔 육류 안주를 곁들여야한다고 해서 육류대신 노란 치즈를 꺼냈다. 꽃무늬 접시에 참 크래커를 펴고, 그 위에 몇 개는 치즈를 올리고, 나머지엔 달콤한 딸기잼을 발랐다. 네모다란 찻상에 가지런히 담아 소파위에 올려진 꽃방석을 내려놓고 거실에 다리를 펴고 앉았다. 소파 팔걸이에서 쉬고 있던 리모컨을 데리고 와 빨간 단추를 눌렀다. 채널이 내려가 있었다. 채널을 올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13번 채널에 맞췄다. 지금 시간은 ‘내 남자의 여자’를 하는 밤 10쯤이다. \"싫증나면 싫증났다고 말하기, 마음이 변했으면 변했다고 말하기, 서로 조용히 보내주기. 싫증이 나려면 20년은 걸릴 거야, 20년 뒤에는 늙어서 다른 생각할 수도 없어……. 우리 그냥 이렇게 잘 늙자.\" 포도주를 입술에 적시듯이 조금 마신다. 덜 익은 감처럼 떫다. 포도주를 입안에 넣고 잠시 머물게 하다가 넘기면 깊은 맛이 머문다고 하는데, 내 뇌리 속에 박혀 있는 것은 감처럼 떫다는 것이다. 잘 익은 포도에서 왜 떫은맛이 날까? 포도주 잔을 눈 위로 올려 들고 몇 초 동안 생각해 본다. 포도주는 설탕 안 넣은 커피처럼 쓰다. 커피와 사랑의 공통점은, 향기롭다는 것과 쓰다는 것과 뜨겁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일 큰 공통점은 중독성이 있다는 것이다. 포도주와 사랑의 공통점은 검붉다는 것일까? 사랑은 정렬적인 빨간색이지만 그 안엔 검은 그림자 색이 잘 섞여있다. 사실 포도주는 병에 들어 있을 때는 검은색인데, 나는 그걸 모른다, 사랑이 검다는 것을 말이다. 검붉은 빨간색을 불빛에 대어보면 맑은 빨간색이 된다. 참 매혹적이다, 사랑을 처음 만날 때 그 사랑은 매혹적이었다. 절제할 수 없는 감정, 이게 아닌데도 빨려 드는 끌어당기는 힘, 반면에 탁한 욕심이 잘 섞여서 보이지 않다가도 시간이 흐르면 검은색이 드러나게 된다. 그 탁한 색이 드러나는 시기는 만난지 1년에서 2년 사이다. 이 시기를 잘 견디지 못하면 병에 담긴 포도주처럼 사랑은 검은색이다, 라고 말하게 된다. 유리잔에 담긴 포도주처럼 사랑을 유지하고 싶다. 말간 빨간색으로, 매혹적인 끌림으로……. 연속극이 끝나갈수록 밤은 깊게 무르익는다. 반잔의 포도주는 금방 컵 바닥을 보인다. 술 맛보다는 안주 맛에 술을 마시게 된다. 크래커는 햇볕에 잘 마른 수건처럼 습기가 없다. 바싹한 수건을 걷어 거실에 앉아 동그랗게 접었다. 동그랗게 접은 수건은 화장실 장에 차곡차곡 쌓아 놓는다. 동그랗게 말린 부분을 앞쪽으로 보이게 놓으면 땔감을 쌓아 놓은 것처럼 넉넉한 마음이 된다. 크래커를 깨물 때마다 부스러기가 찻장위에 먼지가 된다. 포도주를 입에 적시기만 하고 크래커는 한 입씩 깨물어 세 번에 나눠 먹는다. 크래커 맛에 포도주 맛은 잊어버렸다. 텔레비전을 껐다. 오도카니 앉아 있다. 빈 그릇도 나와 함께 찻상에 앉아 있다. 이 밤중에 전화 올 때도 없는데, 핸드폰을 열었다가 닫아본다. 나는 한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면 핸드폰 벨소리를 바꿨다. 처음엔 ‘숭어’가 헤엄을 쳤다. 그 다음엔 기억이 없다. 지금은 ‘보로딘 오페라’가 흘러나온다. 올 봄에 성시경의 ‘거리에서’ 이 노래에 가슴이 물컹거려 바꾸고 싶었다. 안 바꾸길 잘했다. 지금의 내가 슬프지만 내가 나인 것 같아서 행복하다. 그 거리쯤에서 안타까워 울고 있었지만 그 거리쯤에서 우린 대낮처럼 환하게 웃었다. 창밖은 병에 담긴 포도주 색을 닮아있다. 빛이 들어오면 창 밖 세상은 투명해진다. 거리가 투명해지면 사람 발자국 소리가 난다. 뜰이 투명해지면 꽃 숨쉬는 소리가 난다. 아파트가 투명해지면 목소리가 커진다. 검붉은 밤엔 아무도 살지 않는다. 나만 앉아서 허공에 떠 있다. 허공 속에 내 사랑은 나를 깊게 쳐다본다. 사과꽃 터널 속으로 우리가 손잡고 걸어간다. 뜰이 넓은 집이 내 집이라고 했다. 나는 깊게 허공 속으로 눕는다. 빈 그릇을 개수대에 갖다 놓았다. 설거지는 하지 않았다. 접시 하나, 컵 하나, 딸기잼 바르던 차 스푼 하나가 개수대에서 하룻밤을 새울 것이다. 포도주 반잔은 심신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않았다. 반잔만큼 들떠 있었고, 반잔만큼 그리웠다. 반잔만큼 슬프기도 했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아니다. 나는 여기서 멈추련다. 더 이상은 내가 나를 감당 못한다. 이 순간에서 나는 편하고 행복해지고 싶다. \"배경은 보지 않았어. 돈도 명예도 아니었어. 나는 너만 욕심났던 거야. 너 하나만……. \" 밤 바람이 들어올 정도로 거실 창을 열어 놓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