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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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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어머님


BY hayoon1021 2007-05-17

 

별안간 천둥소리가 요란하더니 이내 하늘이 새카맣게 내려앉는다.

창밖을 내다보니 온 동네가 자욱한 어둠에 묻힌 것이 꼭 초저녁 같다. 지금이 오후 2시라고 하면 누가 믿을까. 더구나 방금 전까지 산들바람이 알맞게 부는 화창한 봄날이었다는 걸. 빗물이 들이칠까 봐 나는 서둘러 베란다 창을 닫는다. 그러나 그뿐 부산한 마음과는 달리 더는 할 일이 없다. 습관처럼 어머님 얼굴이 떠오른다. 지금쯤 어머님은 얼마나 종종거리고 계실까. 지붕에 말리는 나물이며 장독간에 널어 둔 빨래를 거둬들이느라.

8년 전, 결혼과 동시에 내게는 2주에 한 번 정도 어머님께 전화를 드려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남편은 아들보다 며느리 전화를 더 기뻐하실 거라며 그 임무를 몽땅 내게 넘겨 버렸다. 첨엔 아무 생각 없이 꼬박꼬박 전화를 드렸다. 하지만 그게 갈수록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사실 수화기 드는 거야 뭐 그리 어려우랴. 문제는 통화내용이었다.

안부 전화라는 게 말 그대로 안부만 묻고 나면 더는 할 말이 없어져 버린다. 거기다 어머님은 전화요금 때문인지 길게 통화하는 걸 싫어하셨다. 그런 분을 붙들고 무슨 얘기를 더 할 수 있겠는가. 그러자니 하면 할수록 안부전화는 형식적으로 변해갔다. 내키지 않는데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이 갈수록 부담스러워졌다. 차츰 전화 거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억지로 하는 전화는 어머님도 별로 달가워하지 않을 거라는 논리로 죄송한 마음을 덮어버리기도 했다.

그렇게 고민하는 가운데 장마철이 닥쳤다. 몇날 며칠 쭉쭉 내리는 비를 보고 있자니 나는 불현듯 어머님 생각이 났다. 전화할 때가 됐나 안 됐나 꼽아보지 않고 순수하게 어머님께 전화하고 싶어진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비가 오니 아마 들일은 못 나갔을 터이고 분명 마루에 걸터앉아 내리는 비만 하염없이 보고 계실 것 같았다.

나는 얼른 시골집 전화번호를 눌렀다. 어머님은 대뜸 놀라셨다. 그동안 전화는 주로 저녁에 했지 낮에 한 적은 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의례적인 인사는 뒤로 미루고 ‘어머니 비가 와요. 지금 뭐 하세요?’ 하는 말부터 먼저 했다. 그러자 어머님이 웃음을 탁 터뜨리며 ‘뭐 하긴? 비가 오니 그냥 앉았지.’ 하는 것이었다. 어머님의 웃음소리는 전화로 처음 듣는 것이었다. 그제야 어머님도 실은 며느리와 통화할 때마다 긴장하고 계셨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웃음으로 물꼬가 트이고 나니 나머지 대화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었다.

그날의 열쇠는 내가 자발적으로 전화를 했다는 데 있었다. 어머님은 서른에 홀로 되어 삼남매를 키워낸 분이다. 체구는 아담하지만 그 강단은 누구도 못 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토록 억척스러운 분이라 해도 내리는 비를 혼자 바라보는 기분이란 무척 쓸쓸할 것 같았다. 그런 내  마음이 어머님께 전해졌기에 그날 통화가 평소와 다를 수 있었던 것이다.

더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장마도 물러나고 푹푹 찌는 무더위 끝에 어느 날 또 비가 왔는데, 그날은 어머님이 먼저 전화를 해서는 ‘여기는 비 오는데 거기도 오나?’ 하는 것이었다. 어찌나 반갑고 기쁘던지. 그 모든 게 다 비 덕분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굳이 날짜를 꼽지 않았다. 대신 비오는 날은 물론이고 아무 때나 생각날 때마다 전화를 드렸다. 화제의 폭도 꽤 넓어져서, 남편 흉이며 아들 녀석들이 애먹여서 힘들다는 하소연까지 가리는 얘기가 없게 되었다. 그렇게 가식 없이 통화를 하다 보니 일 년 가야 몇 번 못 뵙는 분이지만 어느새 정이 쌓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해마다 어머님 생신과 시아버님 기일이 며칠 차이로 겹치는데, 어머님이 원해서 아버님 기일에만 내려가긴 하지만 나는 솔직히 어머님 생신을 더 챙기고 싶을 정도로 어머님이 좋아진 것이다.

창밖이 밝아진 것 같아 내다보니 어느 틈에 먹구름이 걷히고 고운 색시비가 내린다. 이 비에 쑥쑥 자란 상추밭 둘러보며, 그 싱싱하고 보드라운 걸 자식들한테 먹이지 못해 어머님은 또 얼마나 애타 하실까. 그 마음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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