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운명 1%에 노력 99%가 우리네 인생을 좌우한다고 한다. 운명을 어떻게 개척해 나가냐에 따라 행불행은 정해진단다. 하지만 피할수 없는 운명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인간의 한계를 나는 너무도 많이 봐오고 겪어왔다. 지금 처한 상황을 나는 운명 99%에 걸면서 점점 방관자로서 가정의 행복을 깨트리고 있는 공범이 되어가고 있었다. 몇주 전 홀로 정신과 의사를 만나 상담해 본 결과 나 또한 환자가 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상담도중 내 이야기를 듣던 의사선생님은 굳이 그리 자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말씀하셨다. 옆에서 가장 많이 핍박을 받는 배우자들이 갖는 공통심리라 말하면서 남편의 통원치료를 제의 했다. 물론 그후 몇 번의 치료로 조금 나아진 듯 보였지만 이내 모래성이 되어 스러지고 말았다. 또 입원치료 받자고 당사자를 설득하였다가 긁어 부스럼 만든 결과만 초래한 채 내 가족이 떠안고 살아야만 하는 숙제로, 운명으로 받아 들이며 살고 있었다. 동가식서가숙 ... 동해에서 서울로 몸을 옮긴건 집을 나온 후 일주일째였다. 돌아갈 상황도 마음도 없는 난 무작정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때마침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어디니?\" \"나 서울가는 길이야.\" \"어머, 그럼 우리집으로 와.\" 대뜸 무슨이유로 서울로 오는지 묻지도 않고 저의 집으로 오란다. 이미 짐작을 했었는지도 모른다. 선택의 여지도 없이 멍에를 짊어지게 만든 자식에게 너무도 큰 죄를 짓고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딸과 메세지를 주고받으며 근황을 물어보니 변함이 없단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단어 \'무관심\'이 그를 죽어가게 하고 있었다. 고3 수험생이 이런 환경에서 어찌 공부가 될 수 있었을까. 본의 아니게 떠안고 살아야만 하는 딸아이의 앞길을 난 먹먹한 가슴으로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다. 2학년 2학기 휴학계를 제출하고 하숙집에서 전전하던 아들은 낌새로 엄마의 가출을 알아차렸다. 내가 서울에 와 있는걸 알면서도 집회다 모임이다 알바다 하며 이리저리 만나기를 피하는 아들, \'우리도 남들처럼 행복하게 살아보자\' 부탁을 했건만, 거듭 반복되어 일어나는 일에 분노가 치미는지 이젠 알아서 하라는 말만 남긴다. 며칠동안 친구의 집에 묵으면서 친구는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녔다. 정신없이 보내야 시름도 잊고 우울에서 벗어난다고... 아이들에게 죄책감 갖지 말라며 너 자신만을 생각하라 한다. 여린 맘 없애버리고 강하게 살라한다. 그래 그래 그래야지.... 현실 앞에서 천성은 잔뜩 긴장을 한다. 조카아이 결혼준비로 분주한 친정에선 나를 거둬들이려 애를 썼다. 올케언니에게 짊어질 무게가 더 실릴까 저울질만 하다가 친구집 기거 일주일후 들어가게 되었다. 그 와중에 결혼식은 치뤄지고 식장에서 만난 아들의 초췌함에 할 말을 잃었다. 휴학했지만 맡아서 해내어야 할 2학기 답사, 그리고 군대문제, 가정사 모두가 골치아팠을 것이다. 끌어안아 본 아들은 178 키에 뼈만 앙상히 남아 있었다. ** 지난 글 위로의 댓글 하나하나 감사의 표시를 전합니다. 일일이 답글 달아드리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너그러이 봐 주세요~~~|||
2. 운명 1%에 노력 99%가 우리네 인생을 좌우한다고 한다. 운명을 어떻게 개척해 나가냐에 따라 행불행은 정해진단다. 하지만 피할수 없는 운명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인간의 한계를 나는 너무도 많이 봐오고 겪어왔다. 지금 처한 상황을 나는 운명 99%에 걸면서 점점 방관자로서 가정의 행복을 깨트리고 있는 공범이 되어가고 있었다. 몇주 전 홀로 정신과 의사를 만나 상담해 본 결과 나 또한 환자가 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상담도중 내 이야기를 듣던 의사선생님은 굳이 그리 자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말씀하셨다. 옆에서 가장 많이 핍박을 받는 배우자들이 갖는 공통심리라 말하면서 남편의 통원치료를 제의 했다. 물론 그후 몇 번의 치료로 조금 나아진 듯 보였지만 이내 모래성이 되어 스러지고 말았다. 또 입원치료 받자고 당사자를 설득하였다가 긁어 부스럼 만든 결과만 초래한 채 내 가족이 떠안고 살아야만 하는 숙제로, 운명으로 받아 들이며 살고 있었다. 동가식서가숙 ... 동해에서 서울로 몸을 옮긴건 집을 나온 후 일주일째였다. 돌아갈 상황도 마음도 없는 난 무작정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때마침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어디니?\" \"나 서울가는 길이야.\" \"어머, 그럼 우리집으로 와.\" 대뜸 무슨이유로 서울로 오는지 묻지도 않고 저의 집으로 오란다. 이미 짐작을 했었는지도 모른다. 선택의 여지도 없이 멍에를 짊어지게 만든 자식에게 너무도 큰 죄를 짓고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딸과 메세지를 주고받으며 근황을 물어보니 변함이 없단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단어 \'무관심\'이 그를 죽어가게 하고 있었다. 고3 수험생이 이런 환경에서 어찌 공부가 될 수 있었을까. 본의 아니게 떠안고 살아야만 하는 딸아이의 앞길을 난 먹먹한 가슴으로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다. 2학년 2학기 휴학계를 제출하고 하숙집에서 전전하던 아들은 낌새로 엄마의 가출을 알아차렸다. 내가 서울에 와 있는걸 알면서도 집회다 모임이다 알바다 하며 이리저리 만나기를 피하는 아들, \'우리도 남들처럼 행복하게 살아보자\' 부탁을 했건만, 거듭 반복되어 일어나는 일에 분노가 치미는지 이젠 알아서 하라는 말만 남긴다. 며칠동안 친구의 집에 묵으면서 친구는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녔다. 정신없이 보내야 시름도 잊고 우울에서 벗어난다고... 아이들에게 죄책감 갖지 말라며 너 자신만을 생각하라 한다. 여린 맘 없애버리고 강하게 살라한다. 그래 그래 그래야지.... 현실 앞에서 천성은 잔뜩 긴장을 한다. 조카아이 결혼준비로 분주한 친정에선 나를 거둬들이려 애를 썼다. 올케언니에게 짊어질 무게가 더 실릴까 저울질만 하다가 친구집 기거 일주일후 들어가게 되었다. 그 와중에 결혼식은 치뤄지고 식장에서 만난 아들의 초췌함에 할 말을 잃었다. 휴학했지만 맡아서 해내어야 할 2학기 답사, 그리고 군대문제, 가정사 모두가 골치아팠을 것이다. 끌어안아 본 아들은 178 키에 뼈만 앙상히 남아 있었다. ** 지난 글 위로의 댓글 하나하나 감사의 표시를 전합니다. 일일이 답글 달아드리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너그러이 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