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항상 부끄러운 비밀이 하나 있다. 누군가가 반갑다고 악수를 청할 때가 제일 괴롭다. 다름아닌 투박하고 못난 내 손 때문이다. 또 누군가 그랬던거 같다. 얼굴의 주름은 돈을 벌어 지우면 그만이지만 손등과 목덜미의 그것은 환경과 연륜을 말해준다고. 내 손이 그렇다. 일곱 살 때부터 엄마가 아파 눕는 바람에 맏딸인 나는 신데렐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신데렐라 원뜻이 `아궁이 지피는 재투성이`란다.
엄마는 근 오년 반을 시름시름 앓다가 마치 에디오피아 난민처럼 뼈만 앙상히 남은 모습으로 서른 아홉생애를 마감했다. 내 나이 열 두 살, 첫딸로 태어난 죄로 온 집안 일을 도맡아 해야 했음은 말 할 나위도 없다.
12월, 함박눈이 무수히도 퍼붓고 난 다음날 엄마의 장례식을 끝내고, 나는 그 서러움이 식기도 전에 여자 중학교에 입학하는 묘한 희열을 느껴야 했다. 엄마는 살아생전 항상 내게 말했었다. 우리 딸 열심히 배워서 잘 되야지, 잘 살아야지.......
지금 내 나이 사십 둘, 큰 딸은 대학생, 작은 딸은 벌써 중학교 일학년이 되었다. 공부를 못 다 한 게 한이 되어 영어회화만큼은 마스터 해 보겠노라고 동네 어학원에 등록 한지도 7개월이 지났다. 아침 9시면 벌건 눈을 반쯤 뜬 채 시내버스를 타고 학원에 가 열심히 노력하는 척 해 본다.
나는 참말 공부하는 게 즐겁다. 상대방이야 어떨지 몰라도 2,30대의 젊은 학생들과 함께 대화하는 게 신난다. 하지만 어떤 날은 정말 죽을 맛이다. 일어나기 힘들어서다. 전 날 12시 넘어서까지 식당일을 마감하고 집에 돌아온 날이면, 아침 일찍 일어나 씻고 나선다는 게 나자신과의 무언의 싸움처럼 되었다.
지금은 그나마 새벽에 일어나 작은 아이 도시락을 싸지 않아도 되지만, 얼마 전 모 기업체의 불량 급식파동으로 매스컴이 들썩이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온 학교가 급식의 재정비에 들어가는 사태가 있었다. 덕분에 까다로운 작은 애 성미에 못이겨 도시락을 싸 줘야 했기에 아침 잠은 턱없이 부족했었다. 도시락을 싸오는 아이가 반에서 한 두명정도라는 말에 기가 차기도 하고, 그 중 하나가 내 아이라고 생각되니 아무리 내 새끼라지만 혀가 내둘러진다.
허나 어쩌겠는가. 엄마로서 식당을 한답시고 허구헌날 돈이나 툭툭 던져주며 \"점심 사 먹어라.\"
\"저녁 시켜먹어라.\" \"배고프면 가게로 와라.\" 하고 말하는 게 전부였으니.
고집 센 딸아이가 어쩜 엄마인 내게 오기를 부렸는 지도 모를 일이다.
남들 다 먹는 급식을 왜 안먹느냐고 이유를 물었더니 어쩌다 위탁급식업체에서 온 숟가락에 밥풀이 말라 붙어있어 불결하다는 생각에 점심을 굶었단다. 순간 괘씸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에고, 식당하는 부모를 둔 딸이 고작 숟가락 때문에 밥을 못 먹다니. 나는 지 나이적부터 잔반 먹는데 길들여져 있는데.......\'
어찌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기도 하고 한편으로 양심에 찔리기도 하지만 엄마가 챙겨주는 밥이 그리웠는지도 몰라 열심히 도시락을 싸주었다. 그런데 나란 존재는 세상에서 가장 편하게 살려는 엄마인지도 모르겠다. 우습게도 한 달 내내 식당에서 가져 온 김치와 돼지갈비 구이를 반찬으로 싸 주었던 까닭이다. 귀찮음 반, 공부핑계 반으로 한결같이 그렇게 싸 주었지만 아이는 군소리 안하고 도시락을 싹싹 비워 왔다. 어느날은 고기를 넉넉히 구워 친구들에게도 인심 쓰라며 꾹꾹 담아 주었다. 아이는 여지없이 깨끗이 비운 도시락 통을 가져왔다. 친구들과 맛있게 먹었다는 거였다. 나는 변화가 없는 반찬에 물렸을거라 여기고 딸에게 \"내일은 반찬 뭘로 싸 줄까?\" 했더니 대답이 가관이다.
\"삼겹살하고 쌈장. 다른 건 필요없어.\" 하는 게 아닌가.
식당 명색이 고깃집인데 한결같이 고기타령하는 아이를 보고는 제대로 못 잡숫고 돌아가신 神이 붙었나 싶어 속으로 씁쓸히 웃음을 삼켰다.
한 번은 식당에서 손님이 식사를 끝내고 나가며 \"우리애가 그러는데 이 집 딸은 도시락 반찬으로 갈비구이를 싸온다면서요.\" 한다.
무안한 마음에 \"식당일을 하니 집안 살림을 못해 도시락 반찬을 제대로 못 하네요. 애가 고기를 좋아해서 그것만 싸 주고 있네요.\" 라며 너스레를 떨었더니 말없이 웃음 짓는다. 결국은 아이 도시락 반찬이 손님을 내 업소로 인도한 셈이 되어 버렸지만 속이 좋다고 해야 할지 어떨지 모르겠다.
여중 고교 시절, 엄마가 싸 준 형형 색색의 도시락 반찬을 내 놓고 먹는 친구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엄마가 도시락을 싸주는 건 고사하고 전 날 저녁 먹다남은 누런밥을 싸가지고 가서 건강한(?) 밥을 먹는 친구들의 표정을 읽으면 서러움이 목까지 치밀었다.
내겐 도시락을 싸 줄 엄마가 없거든, 이거는 내가 만든 반찬이고....... 이런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어쩌다가 아버지께서 동네 \'어묵공장\'하시는 친구분으로부터 어묵 한보따리를 얻어 오시면 기분좋게 볶음을 해서 도시락에 꾹꾹 눌러 싸 가기도 했다. 또 어쩌다가 내가 담근 깍두기가 맛이 들어 친구들이 서로 달라고 할때는 정말 쾌감이 절정을 달했었다. 그게 학창시절의 감추고 싶은 내 아픔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아픔이 지금 내 손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으니 넌센스 아닌가?
아픔은 아픔을 낳고 고통은 고통을 낳는다고 했던가. 나는 나의 유년시절 또는 학창시절의 그러한 비극들을 내 아이에게 되물려 주고 싶지 않은 욕망이 내면에 강하게 자리하는 지도 모르겠다.
후라이드 치킨은 A지점이 깔끔하고 자장면은 B집이 짜지않고 담백해.
피자는 C회사 것이 레서피가 싱싱해서 좋고 음...냉면은 어느 곳 육수가 맛있더라...
13살 작은 아이의 외식성향은 내 우울했던 어린 시절의 가난을 마치 보상이라도 해 주듯이 열변을 토한다.
냉장고 문을 빼곡히 수 놓은 자석광고판들과 할인쿠폰들이 식당을 하면서도 밥을 못 차려주는 엄마인 나를 아프게 하지만 나는 이제 이 못난 손으로 영어공부를 하고 있다.
하나뿐인 재투성이 신데렐라의 꿈인 셈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