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방이의 비화를 소문 낸 김에 하나 더 !
어느 가을 날 남편이 학생들을 데리고 출장(?)을 갔다. 그 날 저녁 무렵 나는 기억이 잘 안나는 무슨 일로 남편 직장 근처에서 아이들 둘을 데리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러 가고 있었다. 10년 가까이 된 장농 면허로 남편이 남겨 놓고 간 방구차를 감히 운전할 엄두가 나질 않아서 재방이를 안고 (몸이 약해서 기운이 없는 재방이는 늘상 안겨 다녔다) 유치원 다니는 큰 아이를 걸리고 끙끙 깽깽 책들어 있는 가방까지 들고......
바로 그 때 구세주가 나타났으니 우리 방구차 못지 않게 세월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학장님의 쏘나타가 우리 옆에 뭠춰 섰던 것이다. 어서 타라는 말씀에 사양도 않고 고맙습니다 하며 덥석 타버렸다. 우리집이 학장님 댁 가는 길에 있기도 했지만 이 신사중 신사 분의 성품이 낯 잘가리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편안한 분이었던 탓이다. 게다가 천사같은 사모님까지 곁에서 손짓을 하시니 안타면 성의를 무시하는 결례가 되지 않겠는가. ^^ 게다가 학장 전용 공무용 차도 아니고 그야말로 그 분의 \'자가용\'이니까.
태어 난 지 몇 개월 안 된 손주가 미국에 있어서 마음껏 보지도 못하시는 학장님 내외분은 우리 아이들을 무척 예뻐하셨다. 맛이 깨끗하고 담백하고 시원한 무국 같으면서도 반듯하신 어른들과 조심스레 대화를 나누며 오다보니 금세 집 근처에 다다랐다.
버스 정류장을 조금 못 미처 내리면 버스에서 내려 걷는 것 보다 5분을 단축할 수 있는 골목길이 있어서 그 곳에서 내려 주십사 부탁을 드렸다. 탈 때야 덥썩 탔지만 그건 결례를 범치 않으려는 마음에서였고(ㅋㅋㅋ) 이제는 우아하고 사려깊게 배려를 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여기서 내리면 집까지 아이들 데리고 어떻게 걸어 가려구요 그냥 집까지 데려다 줄께요\' (천사같으신 사모님 ) \'그럼 그럼 날씨도 쌀쌀한데\' (다정하신 학장님)
하지만 나도 염치가 있지. 학교에서 제일 높으신 어른에게 골목길까지 들어오셨다가 힘들게 차 돌려 가시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다고 시장하실 것이 뻔한 퇴근 시간에 \'오신 김에 차 한 잔 하시고 가세요\' 하고 빈 말을 드릴 수도 없고.
\'아니에요. 시원한 가을저녁인데 좀 걷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아이들도 산책하는 거 좋아하거든요. 정말 감사합니다.\'
학장님은 집 앞까지 데려다 주고 싶으신데 내가 자꾸 거절을 하니 엉거주춤 갓길로 차를 대시는 찰나였다.
\'나 그거 않좋아 해~애!\'
어윽>>>> 우리 재방이는 솔직한 어린이였던 것이었다. 거짓을 모르는 순진한 어린이.... 상황파악이 되는 큰 아이 또한 구김없이 깔깔거리고 있었다. 허나 나는 아들의 순진함이 귀엽다는 생각보다는 민망한 생각에 양쪽 관자놀이가 찌릿찌릿할 뿐이었다. 얼굴은 나도 웃고 있었지만 속마음은 정말 어쩔 줄을 몰랐다. (재방아! 이 분은 외할아버지처럼 널 친구로 생각해 주시는 관리실장님이 아니야. 학장님이시라고 ~오.)
이왕에 차를 대신 김에 얼른 문을 열고 내리면서 거리낌 없이 허허 웃어 주시는 어른들이 감사 할 뿐이었다.
걸어가면서 내가 재방이에게 물었다. \'너 지난 주에 누나가 꽃 사고 싶다고 해서 저녁 먹고 아빠랑 다 같이 꽃 사러 갈 때는 잘 걸어갔잔아. 엄마를 이렇게 당황스럽게 하니.\' \'나 그 때도 걸어 가는 거 싫었단 마이야. 그연데 내가 싫다 그여면 누나가 울구 그여니까 간다고 그연거지이.\'
휴~ 어찌나 대의명분이 확실하신지.....
\'그럼 재방이가 오늘 걸어 가는 거 싫다고 했으니 엄마도 울어야겠다. 많이 울란다.\' \'아휴~ 엄마는 엄마잔아(어른이잔아라는 뜻) 울구 막 그여면 안되지이\'
그래 이렇게 엄마 품에 안겨 다닐 때 실컷 솔직해라. 네 몸집이 커지는만큼 세상에 너의 솔직함을 받아 줄 자리는 작아지는 법이니.
요즈음은 재방이도 그렇게 솔직하질 못하다. 세상살이에 물든 \'기성\' 초등학생인 것이다. 내가 \'누구 아들?\'하고 물으면 \'엄마아들\' 하던 아이가 더 이상 아니다. 뱃 속에서 내 보내는 그 날 부터 떠나 보낼 준비를 하라고 했던가. 졸업 후에도, 결혼 후에도 구석구석 상관하지 않고 그냥 쉴 수 있는 큰 그늘이 되어주기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수양해야 할텐데.... 내가 너무 일찍 걱정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아름답고 편안하게 보내고, 원할 때는 언제라도 받아 줄 여유로 정말 그렇게 준비되고 싶다.
에세이방 선배님들! 자식에게 가는 마음에 솔직하지 않기가 쉽던가요? 어떻게들 떠나 보내셨나요? 기숙사로, 군대로, 배우자에게로...... 몸으로, 마음으로, 생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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