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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밀려들 무렵에.....(제천 여행기)


BY 蓮堂 2006-12-19

 

     어둠이 밀려들 무렵.


 제천의 어둠은 너무 일찍 밀려들었다. 낯선 곳에서의 하루 길이는 평소보다 더 짧았다. 어쩌면 잡아두고 싶은 시간이었기에 상대적으로 더 짧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여러 사람 앞에 서면 공연히 얼굴 붉어지는 유난한 낯가림은 집을 나서면서부터 떨쳐지지 않는 고민거리였다. 초면인 경우엔 더 심하다. 나잇값도 못하고 어설픈 몸짓 모이는 게 아닌가 하는 소심함이 한 시간 거리 내내 가슴을 조여 놓았다. 낯선 남자를 만나러 간다고 해도 이렇게 가슴 설레고 흥분될 것 같지 않은데 밤잠 설친 까칠한 눈이 자꾸만 감겨왔다.

 버스에 오르면 으레 동반하는 가솔린 냄새도 웬 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멀미라는 것이 컨디션과 무관하지 않은 가 보다. 창가에 자리를 하고 긴 코트를 벗어 걸었다. 한산한 차 안이 오늘 같은 날의 여행을 방해를 하지 않고 만끽할 수 있게 해 주어서 좋다.

 여행 중에 늘 끼고 다니는 시디에서는 이 시대 최고의 소리꾼 소리가 아무도 모르게 귓속으로 흘러들어 흥분과 긴장으로 두근거리던 심장의 박동소리를 조금씩 잦아지게 했다. 몰래 밀어 넣은 노랫소리가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새어 나가니 건너편 좌석의 남자가 흘낏 쳐다보았다.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무안해서라기보다도 가늘게 찢어지는 겨울햇살에 살짝 데인 왼쪽 귓등이 따끔거렸기 때문이다.

 추수를 끝 낸지 이미 오래지만 아직도 들 가운덴 듬성듬성 깔려있는 볏단이 그동안 살다간 흔적을 대변 해 주고 있었다. 화려한 날의 아름다운 추억이라도 가지고 있는 걸까. 아니면 아직도 미적대는 미련이 남아있어 저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걸까.  동안거에 들어간 스님들처럼 저들도 겨울 한철 조용히 품고 내려놓아야 할 짐이 있을지도 모른다. 군데군데 허옇게 끼인 살얼음이 눈부시게 내려앉는 햇살을 한 가닥씩 튕겨 내고 있었다.

 목적지 없는 여행을 해 본적이 있었다. 말 그대로 발길 닿고 시선 머무는 곳에서 낯선 사람과 말을 섞는 재미는 내 삶의 또 다른 나침반이 되기도 했다. 별 아픔 모르고 온실 속에서 살아온 나에게 낯선 곳 낯선 사람은 언제나 신비하고 숙고(熟考)의 대상이다. 나의 위치 나의 입지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답을 여행에서 얻고 돌아온 날은 보이는 것 모두가 아름다웠고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겸손을 배우게 하는 시간이었다.

 터미널에 마중 나온 아름다운 분들의 분에 넘치는 환대에 내가 이렇게 이런 대우 받을 자격을 가지고 있기나 한건지 의문을 품어 보았다. 격의 없고 가식 없이 대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진실로 보여줄 수 있는 투명함이 부족한 게 부끄럽기만 했다. 비록 그동안 눈으로만 익혀온 이름들이지만 글과 모습이 어느 정도 매치(match)가 되었다. 비록 한 줄의 글이지만 내적이든 외적이든 있는 그대로는 숨김없이 드러내 주는 묘한 힘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둔한 내 직감으로도 맞아 떨어졌는지 모르겠다.

 이 인연을 얽어준 고리의 시발점은 조그마한 점이었을 것이다. 그 점을 중심으로 부챗살같이 펼쳐진 만남의 연은 기하급수적인 숫자를 잉태하고 있다.

 악연도 인연이라고 했지만 맺기 나름 아닌가 싶다. 내가 인연이고 순연이라고 생각한다면 굳이 상대방이 악연을 맺으러 달려들진 않을 것 아닌가. 내 할 탓을 남 탓으로 돌리는 우(愚)를 스스로 범해놓고 덫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지천명을 넘기면서 항상 나를 닦달하는 게 있다면 ‘탓’을 항상 나에게로 돌려놓는 마음 짓 이었다. 모르고 살았던 나의 ‘티’가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을 때의 그 부끄럽고 낯 뜨거운 기억들은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은 생채기였다.

 입에 발린 소리, 들려주기 위한 포장이 아닌 진정 가슴으로 얘기할 수 있을 때까진 아물지 않을 것 같다.  

 참으로 아름다운 분들이었다. 살면서 이토록 아름답고 맑은 분들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데 그 어려운 인연들을 품을 수 있는 하루가 너무 아쉽기만 했다.

 하룻밤 묵어간다고 무어 그리 탈나는 것도 아니건만 굳이 손 뿌리치고 돌아와야 하는 속내는 하룻밤 외박도 허용 않는 고지식한 남편에게로 원망의 화살을 돌려야 했다. 연말에 잡혀있는 스케줄도 발목을 잡고 있지만 어렵게 마련한 이 귀한 시간을 이런저런 이유로 박차고 나와야 하는 맘이 너무 무겁다.

 화기애애한 자리에 구멍을 내는 건 참으로 미안하고 민망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떠야 할 경우엔 쥐도 새도 모르게 빠져나가야 뜬 자리 구멍이 더 커지지 않는데 만나자마자 곧 가야 된다는 호들갑을 떨었으니..........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이 떨어지는데 걸린 시간이 너무 길었다. 잡은 손 놓아주지 않으려고 힘을 줘 보기도 했고 어린애 같이 품에 안은 오월님의 가슴이 너무 따스했다. 스물 스물 밀려드는 어둠살 속에서 한번이라도 더 익혀두고 싶었던 모습들이 고개 돌린 사이 스러질까봐 다시금 고개를 돌려보곤 했다.

 저만치 멀어지는 뒷모습들 위로 짧았던 하루의 필름이 조용히 돌아가고 있었다.

 어둠 속에 엎드려 있는 버스위로 몸을 얹었지만 마음은 여섯 명이 몸 구기며 맑은 웃음과 찰진 농담 던지던 하얀 5인승 승용차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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