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되어서인가.
아니면 서른 후반에 들어서서인가.
상념에 잠겨 이러저러한 생각들을 자꾸 하게된다.
어제는 오랫만에 남편이 늦게들어온다고 해서 애들과
저녁먹고, 애들이 잠들고 나니 왠지 혼자인듯 쓸쓸한 기분이 든다.
귀가~
난 정말 집에 가기 싫어하는 아이였다.
어릴때 밖에서 뛰어놀다 모두 돌아가고 혼자 남아있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물론 우리엄만 날 부르느라 목이 터져나갔지만, 못들은척~
늦게만 들어가고 싶었던 그시절~
집에들어가면 업어줘야하는 동생, 울어대는동생, 엄마 등짝에 매달려
자는 동생, 줄줄이 넷이나 오물조물거리고, 술취한채 자는듯, 고함지르는듯,
웽웽하는 소리로만 들리고, 나의이름을 오분에 한번씩 불러대는 아버지,
요즘도 누가 내이름을 불쑥 부르면,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아, 그자리에
풀썩 주저앉을뻔 하게된다.
내나이 일곱살때부터 다섯살 아래 하나밖에 없는 금이야 옥이야 하는
남동생은 내차지가 되었다.
엄마가 아들하나로 부족하다고 또 아기를 낳았기 때문이다.
그때가 칠십년대~ 둘도많다. 하나만 낳자고 외쳐대던, 그때 그 시골에선
아들을 바라는 마음에 넷이고, 다섯이고, 낳고보자는 부모님이 계셨다.
혼자선 업지도 내리지도 못해서, 아침에 큰띠를 꽁꽁 싸매어 업혀주면,
동생을 업고, 고무줄도 하고(애들이 안끼워줘 혼자 까만 빤스고무줄을
나무에 매어놓고 했다) 변소에 가서 오줌도 누고, 점심먹을때나 엄마가
논이나 밭에서 돌아와 아이띠를 벗겨주었다.
점심먹고 나면 또 나에게 아이를 동여매어주고 일하러 나가시곤 했다~
그러던 것이 내가 여덜살, 국민학교에 입학을 하게되니 그렇게 좋을수가
없었다.
학교에 가면 동생을 업을 필요도 없고, 친구들과 마음껏 어울려 놀수도
있었고, 더구나 학교엔 도서관이 있어서 책도 마음껏 읽을수 있었다.
정말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때부터 쭉~ 집에서의 탈출만 꿈꾸었던것 같다.
집으로 돌아가는건 내겐 지옥의 문을 들어서는것과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러나 엄마는 그런걸 전혀 이해 못한다~
고함과 욕설이 난무하고, 밥상이 날아다니고, 밤새 한숨못자고, 급기야
남의 집으로 피신해 눈을 붙이는 신세라도, 집을 굳건히 지켜야 한다고
믿는다.
많은 상처를 입고, 치유되지않은 마음의 병을 안은채 살아가는 가족들을
볼때면 과연 엄마의 그런 선택이 옳았을까~
그런 상태에 놓여있는 가정에 끝까지 참고 견디라고 말할수 있을까~
차라리 새삶을 찾아보라고 등떠밀고 싶다.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떤 엄청난 상처를 주더라도 다 참아야만 하는가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격리시키는것마저 죄인취급하는가
그런 아버지에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죽어야 끝나는 일이라고
참고 견디어야 한다는 엄마의 그 편협함도 오늘은 너무 싫어진다.
어느 사춘기시절, 반항의 시기에 아버지에 맞서다 생긴 옆구리의
상처가 문득 시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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