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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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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년6.......가출


BY 주연 2006-10-28

 그렇게 그를 떠나보내고,

주위엔 온통 크리스마스 캐롤송이 흘러나오고 가뜩이나 추운 겨울이  더 시렸다.

정이 그래서 무섭다고 그러는가.

주위에 있을땐 모르겠더니, 막상 그이가 동생들을 데리고 떠나니까 나는 외로워졌다.

직장생활에 잘 적응도 못하던 나는, 새로운 직장에서의 갈등과 그와 동생들과 다니면서

늦은귀가로 인한 부모님과의 갈등 등으로 해서 나는 집에서 탈출이 하고싶어졌다.

능력이 있어서, 또 괜찮은 직장이 있어 원룸이라도 얻어 나갈 형편도 못되고 한 나는

갑갑함을 느끼면서 용인에 있는 그에게 조심스레 연락을 해봤다.

그 땐 그에게 어떤 기대도 없었다.

그저 너무 답답했기에, 예전에 나에게 잘해줬던 그들이 보고싶었을 뿐이었다.

용인과 서울의 중간지점인 수원에서 만나 같이 저녁도 먹음으로 해서 나의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은 나아졌다.

그렇게 그에게 한번, 두번 연락을 취해 가끔 만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부모님과 굉장히 심하게 다투곤, 용달차를 불러 나의 옷가지와

물건들을 챙겨 용인으로 향했다.

뭘 믿고 그랬는지 모르겠다.

막연하게 나를 내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그당시 그는 웨딩홀에서 얻어준 빌라에 동생들과 같이 기거를 했기에, 나는 그리로도 갈 순

없었는데도 왜 무작정 그에게로 갔을까?

그는 무턱대고 찾아온 내게 자신의 돈을 털어 원룸의 보증금을 내주었다.

보증금 800 만원에 월세 25만원.

어짜피 없어지진 않을 보증금이지만, 월세는 내가 내야 겠기에 열심히 벼룩시장을 뒤져

새로 오픈한다는 가든에 이력서를 내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다른이들보단 가방끈이 길어서인지, 그들보단 외모가 나아서 그런지

나는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언니들을 제치고 주임의 타이틀이 붙여졌고, 써빙하는 언니들을

관리해야 했다.

하지만, 리더쉽이라곤 찾아 볼 수가 없는 나는 언니들에게 휘둘리기 쉽상이었다.

그런 나에게 이미 밑에 사람들을 많이 거느려본 그는 많은 조언을 해주었지만,

머릿속에선 정리가 되도, 막상 사람들 앞에선 행동하지 못하니.

이래서 리더쉽이 있는 사람은 미리 정해져 있기 마련인가 보다.

나는 내일은 묵묵히 하는 사람이다.

오픈 하는 날도 손발이 제대로 안맞어 가든이 우왕좌왕 하는 가운데서도 나는 나이든  부부

들의 주문내역을 내딴에는 성심껏 잘 챙겨드렸다.

그것이 그들의 눈에는 예쁘게 보였는지, 오실때 마다 나를 찾곤 하셨으며 가실땐 꼭 팁으로

만원을 주셨다.

그때 난 팁이란 매력에 푹 빠졌다.

월급은 월급대로 챙기고, 간간히 생기는 팁의 매력이란.......^^

나의 역할은 정문에 있다가 손님들이 오시면, 적당한 자리에 안내하고, 카운터가 쉬는

날이면 그 역할도 수행해야 했다.

팁의 매력에 빠진 나는 손님들이 많아 써빙하는 언니들이 힘겨워 하면, 슬쩍 언니들을 도와

써빙도 도와주곤 했다.

그런 나에게 나를 찾는 단골 손님도 생겼다.

간혹 아주 짖궂은 손님도 계셨는데, 그 분은 가실땐 꼭 두둑한 팁도 잊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 분이 가시고 난 그날은 난 언니들에게 한턱씩 쏘기도 했다.

물론 내주머니에서 나갔지만, 내돈은 아니었다.

^^

그때가 나의 제2의 전성기였을까!

내가 말한 전성기란 금전적으로 여유로웠던 때를 말한다.

첫번째는 그사람을 만난 그직장에서 였고, 두번째가 지금이었으니,

언니들에게 나름대로 인심도 써가며 한턱씩 쏴도 내 월급에선 한푼도 안나가고 그대로

모아졌다.

그와 내 월급은 통장에 다 넣고도 팁만으로도 생활이 되던 때였다.

같이 살게 되서 더 알게된 그는 굉장히 자상한 사람이었다.

그보다 늦게 오거나, 주 1회 휴무인 그보다 하루 더 출근해야 하는 날 위해

청바지나 옷가지들을 빨아주고(그땐 세탁기가 없어서 손빨래를 해야했다.) 설겆이도 해놓고

청소도 해놓는등 가정적인 남자였다.

그리고 이런 직업의특성상 이직률이 굉장히 많은데도 그는 비록 자주 직장은 바껴도

사이사이 하루도 논 적은 없었다.

아, 이런 사람이라면 처자식 굶어죽일 일은 없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지내다보니 우린 말이 없어도, 서로 결혼하는 사이가 되버렸고,

나는 부모님들께 그를 소개시켰다.

우리 부모님들은 역시나 반대였다.

그분들이 생각하시기에 그이가 갖고 있는 직장이란게 별볼일이 없고, 나보다 나이도

많았을 뿐더러, 그렇다고 집안이 넉넉하지도 않았던지라, 반대의 요소는 많았던 것이다.

그래도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결국엔 결혼 승낙이 떨어졌고,

서울에서 상견례가 이뤄졌다.

우리집과는 달리 그의 집에선 굉장히 나를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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