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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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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모음 (시청앞 그 거리.2)


BY 개망초꽃 2006-10-25

사방에 눈이 달린 시험장안에선 커닝은 커녕 고개를 옆으로만 돌려도 오해를 받을까봐

모니터만 뚫어지게 보며 차근차근 문제를 풀어나갔다.

답을 클릭 하는 소리가 처마 끝에 빗물 떨어지는 소리 같았다.

또각또각 따각 따따각…….

30분쯤 지나니 옆에서 시험을 보던 초등학생이 나가고

앞에 초등학생도 나가고

내 앞에 있던 대부분의 초등학생들이 아스팔트에 빗물 마르듯 빠져나갔다. 

고개를 살짝 돌려 눈치껏 뒤를 보니 서너 명만 남아 있었다.

문제가 쉬어서들 빨리 나갔을까?

모르니까 대충 찍고 나갔나?

검산을 해도 십 분이 남아 있었다.

다시 눈치를 보며 뒤를 돌아보니 나 혼자였다.

감독관 한 사람만 나를 보고 있고 시험장안은 텅 빈 소리가 났다.

나는 흠칫 놀라서 시험 종료를 따깍 클릭하고

젊은 감독관님께 안녕히 계세요, 깍듯이 인사를 하고 나왔다.


같이 공부하고 같이 자격증 시험을 보러온 일행들 얼굴은

‘무사히 합격’ 이라는 표정들이었다.

그제야 갈증이 났다. 먹다 두고 온 음료수를 찾으니 탁자는 이미 치워져 있었다.

오랜만에 서울로 나온 김에 친구를 만나기로 하고

1호선을 타기 위해 시청 앞 네거리 쪽으로 걸어갔다.

시청 앞 광장을 중심으로 프라자 호텔이 그대로였고,

삼성본관쪽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덕수궁이 옛것을 그대로 간직하고 살아 있을 것이다.

내 젊은 날의 추억을 꼭 껴안고 있는 웅장한 빌딩과 은행나무 고궁과 복잡한 거리들.........

나는 이 곳에서 남편을 만났다.

사내 결혼이었다.

사내 결혼이 아니었음 절대 만나지 않았을 사람이었겠지만

인연은 그 누구도 빗겨갈 수 없고 거부할 수도 없는 것.

남편 또한  억 겹의 인연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이었다.

남편 뒷배경이 내가 원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삼성에 다녔고, 부잣집 막내아들이었고, 배울 만큼 배웠고,

멋지게 생기지는 않았지만 인간성이 부드럽던 사람이었다.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싫어하지는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인연이 따로 있고,

결혼하는 인연이 따로 있다고 했는데,

남편과 나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결혼상대자였을 것이다.

마주보며 근무를 했다. 그래서 편했고 그래서 친해졌고 조건이 좋아서 결혼을 했다.


프라자 호텔 커피숍에서 선을 두 번 봤었다.

한번은 왕십리 같은 동네에 살던 남자가

나를 보고 소개 시켜 달라고 우리 엄마한테 졸라대서 선을 봤다.

만나자 마자 내가 시건방지게 굴어서 선을 보고 와서 그 남자가 우리 엄마한테 그러더란다.

보통 벌어서는 내 사치에 나가떨어지겠다나 그래서 다시 만나자는 말이 없었다.

남자가 나한테 질린 것이다.

첫인상이 소도둑놈 같이 생겨서 내가 일부러 사치스러운 말만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만나지도 못하고 내가 거절을 했다.

만나자는 약속을 잡고 있었는데

그 남자가 내가 가수 김수희를 닮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중매서는 사람한테 듣고서는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았다.

나는 김수희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외모였으니까.

없었던 일로 하자고 미리 전화를 했는데도 무조건 기다리고 있겠다는 연락이 왔지만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혼자서 덕수궁 은행나무 벤치에 앉아 시간만 때웠다.

인연이란 내가 억지로 만들려고 해도 이루어지지 않고,

주변에서 억지로 엮어주려고 해도 엮어지지가 않는다.


아침마다 왕십리 비탈진 골목을 빠져 나와 만원 버스에 구겨져 출근을 했다.

그러다가 지하철이 생겨 지하철에 구겨져 출근을 했었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삼성과 연결고리가 있는 여행사였다.

흰 블라우스에 빨간 조끼에 빨간 통치마 회사 옷을 갈아입고 근무를 했다.

청소부 아줌마가 여행사 여직원들은 인물을 보고 뽑았나봐 했는데,

물론 얼굴들도 예뻤지만 빨간 회사 옷이 한몫을 차지했을 것이다.

결혼식 예복이 우연히 빨간색 정장이었다.

회사 여직원이 빨간색 지겹지도 않니? 그랬었다.

나는 삼성본관 으리으리한 직장이 지겹지 않았다.

결혼 후에도 그만 두고 싶지 않았지만 사내 결혼이라서 더 이상 다닐 수도 없었고,

남편이 부자라서 직장을 다니지 않아도 됐다.


지금쯤 덕수궁엔 은행나무가 노릿노릿하게 가을햇살에 익어가고 있을 것이다.

이십년이 훌쩍 넘긴 세월이 흘렀어도 가끔은

“덕수궁 돌담길에 아직 남아 있어요…….”

이런 가사의 가요를 들으면 옛일이 도져 가슴이 뭉클거린다.

그땐 그랬다. 덕수궁 돌담길을 걸을 때마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 계단에서

‘사는 게 이게 아닌데…….이렇게 사는 것이 아닌데…….’

지금도 그런다. 아파트 계단을 내려가면서, 느티나무 가로수 길을 걸으면서

컴퓨터 교실을 빠져 나오면서

‘사는 것이 이게 다가 아닌데…….내가 이것 밖에 안 되는 건가......’


화이트칼라였던 남편은 지금 없다.

몇 달째 행방불명이다.

전화 연락도 받지 않는다.

남편 집안에서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다고 한다.

빚에 쪼들려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는 건지,

빚에 밀려 중국으로 도망을 간 건지,

여자가 생겨 가정을 꾸리다보니 연락을 안 하는 건지 도통 모른다.

그 옛날에는 누구보다 잘났고 잘나가던 우리였는데......

시청 앞 그 거리엔 돈 많던 그 남자도 없고, 시건방지던 그 여자도 없다.

기억만 남아 삼성본관처럼 프라자 호텔처럼 덕수궁처럼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다.

우리의 젊은 시절은 행방불명이 되어 버렸다.


워드프러세서 자격증은 함께 공부한 학생 전원이 합격을 했다.

어려운 컴퓨터활용능력시험은 몇 명만 빼고 합격을 했다.

나는 둘 다 합격을 했고, 필기는 이제 끝났다.

낙엽 쌓여가는 길목을 걸어가며서

‘사는 것이 이게 아닌데...’ 해도 실기를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가을이 거리거리마다 빠르게 움직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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