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나보다 세 살 많은, 사람을 막대하는 기질이 있는 한 여자선배가 있다. 이 선배는 잦은 여행으로 직장옮기기를 밥먹듯 했던
내게 일거리를 소개시켜준 신모 선배. 업계에서 냉소적이라는 평판이 있는, 내게는 한참 선배이긴 했지만 말로만 들었지 직접 만난
적은 없는 선배였다. 냉소적인 평판이 걸렸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인데다 여행비를 벌어야 했기에 나는 좋아라 선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돈을 벌기위해 나는 그 선배의 새끼작가가 되어 어느 방송국의 어떤 프로그램을 맡아 글을 쓰게 된 것이었다.
이 선배의 사람을 막대하는 기질에 대해선 익히 들은 바 있지만 체험해보니 이것은 실로 고단수다 싶었다. 작가들이 설설기는
피디들이나 유명 출연자들한테도 막말을 하는 것을 보고 저런 기질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나 싶어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선배의
꼬붕이 된 나는 선배의 그런 기질을 좀 배우고 싶어 어쩌다 한 번 따라했더래도 ‘쟤 오늘 뭐 잘못먹었어?’ 정도로 취급되지
선배처럼 한방에 먹히질 않았다. 성격은 천성인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런 선배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선배가 왠지 좋았다. 내가 이방기질이 있고 선배가 사또기질이 있어서 그랬는가 모르겠지만 우리는 함께 일하는 동안 죽이 잘맞았고 그 관계는 지금까지 별탈 없이 이어지고 있다.
선배는 주위사람들한테만 막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심각한 속얘기도 남의 얘기처럼 설렁설렁 하는 버릇이 있었다. 맏딸로 태어나
어려운 친정엄마 용돈이며 생활비 대주는 이야기, 하루가 멀다하고 직장을 뛰쳐나오는 남편 직장구해주는 얘기, 사표를 쓰다쓰다
이제는 실업자가 되어 집구석에 노는 남편 얘기, 이외에도 여러 가지 남편이나 시댁 사이에 있었던 밝힐 수 없는 얘기 등등. 이런
얘기들을 어디서 주워들은 얘기처럼 콧방귀까지 뀌어가며 설렁설렁 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이해가 안되었다.
그러다 내가 심각한 얼굴로 인생상담을 좀 할라치면 선배는 사람막대하는 특유의 눈짓으로다가 내게 이렇게 타박한다.
‘너는 얘, 젊은 애가 왜그러구 사니? 그게 뭐 죽을 일이라고 죽상을 쓰고다녀? 꼴보기 싫어죽겠네. 나 봐! 나도 산다.’
그 소릴 듣고나면 섭섭하다기 보다 오히려 인생상담을 다시 할 필요도 없이 어, 정말 별거 아닌걸로 죽상을 하고 다녔네 하는 생각이 들고, 고민했던 문제가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작년에 한국엘 갔을 ㅤㄸㅒㅤ다. 나는 제일 먼저 선배에게 연락을 했다. 옛날에 그 물에서 일하던 사람들이랑 만나서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마셨다. 얘기 끝에 선배는 한때 잘나갔던 후배 유모씨가 결혼해서 다운증후군 아기를 낳았고, ㅤㅉㅗㅈ겨나듯이 이혼당했다는 얘길
했다. 당시 그 여자가 얼마나 잘나갔는지 아는 터라 그 얘기는 내게 쇼크였다.
‘걔가 하루는 나를 찾아왔더라구. 한동안 연락도 없이 지내다가 왠일인가 했지. 걔는 우리가 어제 만난듯이 지난 얘길 하는거야.
걔 결혼할 때만 해도 다들 결혼잘한다고 했거든. 근데 그 남자집안 알고보니깐 순 상놈의 집안이더라고. 다운증후군 낳고부터
시집에서 애를 하대하다가 결국 이혼하게 만들었잖아. 근데 돈이라도 몇푼 쥐어줘서 집이라도 구해주면 좀좋아. 애가 그 어린걸
데리고 하꼬방에서 산대더라. 하꼬방에. 근데 웃긴건... 난 걔가 옷을 워낙 차려입고 와서 처음 봤을땐 그러구 사는지는
몰랐잖아. 입술 쥐잡아먹은 것처럼 빨갛게 칠하고, 옷은 아주 날아가게 차려입구선, 껌까지 짝짝 씹어대면서... 하구다니는 건
옛날 그대로더라구. 좋아보이더라. 애가 꾀죄죄해 보이지 않아서.’
유씨가 꾀죄죄하게 차려입고 와서 선배앞에서 질질 울면서 신세타령했으면 모르긴 몰라도 선배한테 욕좀 얻어먹었으리라. ‘얘, 너는
젊은 애가 재수없이 오랜만에 찾아와서는 죽상을 쓰고 신세타령이니? 나봐, 나도 산다!’ 하고 말이다. 어쨌든 선배는 그 넓은
오지랖으로다가 서울 근처에 있는 편모와 아이가 들어갈 수 있는 8평남짓한 아파트를 알아봐주고 전세금까지 몇백만원 변통해주었다고
했다.
“걔가 그러구 사는데 내가 돈 몇백만원 갚으란 말이 나오겠니? 그돈 빌려주는 걸로하고 못갚으면 연락끊을 것 같아서 그냥 주는
걸로 했어. 근데 걔도 좀 낭창한 경향이 있잖아. 나처럼. 돈 입금했다고 전화하니깐 좋아서 헤헤 웃더라 웃어.”
한때 잘나가던 여자의 절단난 인생을 얘기하는 투가 이렇게 가벼우니 듣는 우리 역시 살다보면 그보다 더한 일도 겪는걸, 아직 젊은데 뭐라고 못할까, 하는 투로 고개까지 끄덕여가며 일단 유씨의 이야기는 그렇게 결론이 내려졌다.
날씨가 어두워졌고 모두들 술이 한 잔씩 돼서 집으로 가려고 식당을 나오니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선배는 우산 안가지고온 내게 우산을 불쑥 내밀며,
“어이, 이거 가져가. 산성비 맞으면 머리빠진대.”
이런다. 자기도 우산 하나만 가져왔으면서. 그래서 나는 거절하느라 ‘이거 나주면 선배는 어떻게 해? 선배가 가져가!’ 하고 도로 내밀었더니 또 막말이 나온다.
‘얘, 이런 걸로 좀 쪽팔리게 길가에서 옥신각신 하지말자.’
이러구선 온다간다 말도 없이 뒤돌아 걸어내려갔다.
그게 선배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나는 살다가 힘든 일이 있으면 선배 생각이 난다. 내가 힘들다고 선배한테 전화해서 인생상담이라도
좀 할라치면 또 젊은게 별거 아닌 일로 죽상을 쓰고 다니면서 자기까지 기분나쁘게 만든다고 면박을 주겠지. 보나 안보나 뻔하다.
이렇게 선배생각을 하면 죽을 병에 걸리지 않은 이상 살아가는 일이 별거 아니게 느껴진다. 나는 얼마전에 선배에게 메일을 보냈다.
‘신선한 신선배, 요새 뭐하고 지내요?’
되도록 청승스러운 건 빼고 주저리주저리 길고 재미있게. 선배가 읽으면 답장을 쓰고싶게. 그런데 한 달이 넘도록 답장이 없다.
무소식이 희소식이겠지.
선배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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