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어!’
남편 방만구씨가 이렇게 말하면 나는 그 좋은 생각이라는 것이 궁금하기보다 이번엔 이 남자가 또 무슨 꿍꿍이 속일까 싶어 늘
귓전으로 듣는다. 좋은 생각이래봤자 반대파에게 ㅤㅉㅗㅈ기는 야꾸자 두목이 북극엘 가는 얘기, 세상에서 차단된 섬에 사는 섬주민들이
8차선 고속도로 닦는 얘기 등, 좋은 아이디어일 수는 있겠지만 돈은 절대 안되는.
방만구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예술대학 만화학과에 진학하려했으나 실력이 부족했는지 운이 부족했는지 떨어졌다. 그후 중국무술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종합대학 동양학과에 진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졸업후 좋아하는 만화는 못그리고 조그만 무역회사에서 텅스텐이니
구리가루니, 톱니바퀴 같은 것들을 팔고 앉아있자니 얼마나 좀이 쑤실까. 상황이 이렇다보니 방만구씨는 늘 만화에 미련이 남아
집에만 오면 ‘프로젝트’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나는 방만구씨가 단 한번도 나처럼 심심해서 주리를 틀거나 낮잠자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늘 나름대로 중요한 프로젝트 구상에 바쁘다보니 오늘도 그의 뇌는 쉴새없이 돌아간다.
프로젝트라는 것이 만들어지면 그는 다이어리에 그 프로젝트를 다시 세밀하게 분류한다. 스토리만들기, 그리기, 색깔먹이기 등.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완성된 그의 작품들을 보자면, 멍청한 두 깡패의 이야기를 다룬 ‘목과 데스몬드’, 창녀와 깡패의
사랑이야기를 그린(이 만화캐릭터의 생김새는 나와 남편에게서 따왔다) ‘막스와 순이’ 사람의 뱃속에서 나온 괴물과 동굴에 사는
괴물이 맞붙어 싸우는 ‘괴물’, 비타민제를 복욕하고 피부병에 걸려 죽은 남자의 이야기(제목미정) 등이 있다. 그리고 지금은
세상과 고립된 카나리아 제도에 사는 주민들이 8차선 고속도로를 닦는 이야기를 구상중이다.
그의 프로젝트들이 완성되면 그걸 신주단지 모시듯 파일에 모셔놓고 친구들이 올때마다 꺼내서 보여준다. 한 번은 우리집에서
먹자파티를 연 적이 있었는데 10여명의 친구들을 초대한 나는 남편의 완성된 프로젝트들을 벽과 장농에 붙여서 사람들한테 보여준
적도 있었다. 워낙 읽어주는이 없는 만화를 그리다보니 생각해낸 것이 바로 먹자파티 전시회였던 것이다.
만화외에 그가 즐기는 것이 있으니 보드게임이라는 것이다. 주말이 되면 종종 방만구씨는 친구들을 불러다 놓고 보드게임을 한다.
보드게임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마분지 쪼가리들을 땅이라고 붙여놓고 딱지와 가짜돈으로 뭘 사고 팔고 식민지를 개척하는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린시절부터 땅따먹기, 고무뛰기, 오자미 놀이같은 놀이만 하고 논 내게 보드게임은 아주 생소한 게임이었다. 호기심이
생겨 나도 한번 해본 적이 있었다. 종이딱지같은 걸 석탄, 나무, 옥수수, 교통시설, 집이라 치고 그걸로 무역도 하고 마을도
만들고 식민지도 개척했는데, 돈을 딸 수 있는 고스톱같은 거라면 모를까 그런 종이돈으로 장사하는 게임은 내 식미에 영 안맞았다.
그가 친구들과 보드게임을 즐기는 걸 보고 결혼초 나는 방만구씨가 철이 좀 덜든 사람, 요즘말로 키덜트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었다.
우리나라에서 그런 건 애들이나 하는 놀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여기 독일에선 어린이용에서 어른용까지 다양하게
보드게임이 시판되고있고 그걸 사서 모으는 보드게임 마니아도 꽤 있었다.(방만구씨의 주장으로는 장기도 보드게임의 일종이다) 그런
마니아들에 비하면 방만구씨는 돈 쓰는 것도 아니지만 그 역시 새로운 게임이 나오는 족족 사고싶어한다. 내 눈치를 봐가며 몰래몰래
사거나 아니면 이베이를 통해서 헌 것을 주로 산다. 헌것이라 해봐야 3만원 선에 판매하니 이걸 사모으는 데에도 꽤 큰돈이 든다.
이렇게 보드게임들을 사다모으기만 하던 방만구씨가 얼마전부터는 자기가 좋아하는 게임들을 모방, 삭제, 수정하여 스스로 보드게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주말만 되면 놀러도 안나가고 집에 눌러 앉아서 마분지를 주워모았다. 전화번호부 겉장이나 광고지 전단중에서도
빳빳한 종이가 있으면 그것들을 모아두었다가 딱지를 만드는데 사용했다. 그리고 인근 건축재료상에 가서 나무조각들을 주워와
깍뚝썰기를 하고 페인트칠을 해서 그걸로 게임에 필요한 곡식들을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것이 이름하여 ‘전국’이라는 보드게임이었다. 그것은 그의 첫 작품이자 방대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를 배경으로한
보드게임이었다. ‘전국’은 넓은 중국땅을 배경으로 벼슬아치와 일반 시민과 병사들이 마을을 만들고 시장을 만들고 전쟁을 하는
게임이다. 중국지도를 완성한 후 그는 캐릭터 딱지들을 만들었다. 장군, 말탄군인, 집, 시장, 요새, 궁궐 등... 90킬로에
육박하는 남편이 주말내내 딱지를 만드느라 쭈그리고 앉아 그 자잘한 것들을 그리고 붙이고 썰고 있었다. 쯧쯧쯧...
오랜시간이 걸려 ‘전국’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그의 첫 작품이 실패작으로 판명되는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게임의 고수들이
모여앉아 게임을 해보았지만 룰과 지도가 너무 길고 방대하여 1시간 이상 게임을 해도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 작품이 실패로 끝나자 방만구씨는 첫작품에 미련을 버리고 다른 프로젝트에 야심차게 도전했다. 이번에도 역시 중국과 연관된
게임이었다. ‘킬러들’이라는 게임인데 이 게임에는 이름있는 홍콩영화에 나오는 유명한 배우란 배우는 다 출연한다. 장국영,
유덕화, 주윤발, 토니륭, 존우, 안토니 왕 등... 이 유명인들의 얼굴이 그가 만든 딱지에 붙어있다. 그리고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총이란 총 역시 다 딱지로 만들어졌다. AK47, HK, MP5, 사무라이 칼, 쌍권총. 이 게임에서 사람중에 제일
점수가 높은 왕초는 영화감독 존우이고 무기중에서 제일 점수가 높은 무기는 쌍권총이란다.
인터넷에서 이미지를 찾고, 포토샵으로 인물의 크기를 비슷하게 조절하고 컴퓨터로 프린트하고 그걸로 딱지를 만드느라 여러날을 보낸 끝에 드디어 ‘킬러들’이 완성되었다. 방만구씨는 한차례 전화를 돌려 친구들을 불러모았다.
‘모여라, 이제 너희들이 고대하던 ’킬러들‘이 완성되었다.’
‘킬러들’은 이렇게 오랜 산고끝에 드디어 세상빛을 본 것이다. 방만구씨의 두 번째 야심작이었지만 이 작품 역시 게임도중에
치명적인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현재 방만구씨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킬러들 수정프로젝트’라는 미명하에 분주하게 움직이고있다.
나는 이렇게 만화그리기와 보드게임 만들기를 좋아하는 방만구씨에게 한 번도 싫은 소리를 한 적이 없다. 그의 취미생활에 들어가는
돈은 술마시는데 들어가는 돈보다 적으며, 만화와 보드게임 그리기는 휴일날 낮잠자는 것 보담 훨씬 건설적인 일이라 사료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만화그리기와 보드게임 만들기를 좋아하는 방만구씨에게 한 번도 그걸로 돈을 벌어오라는 말을 한 적도 없다. 그의
실력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나는 그가 그저 그걸로 즐기기를 바란다. 혹자는 즐기면서 돈버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직업이라
하지만 나는 이 세상엔 즐기면서 돈버는 직업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