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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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꽈리와 요정.


BY 일상 속에서 2006-09-08

벌써 가을이네요. 여러분들 모두 건강하시죠? 오랜만에 들어온 아컴 도배를 새로 했네요. ^^

새 집에 들어 온 기분입니다. 아이들이 개학을 했으니 저도 이제 게으름에서 벗어나야 할 텐데...^^ 요즘 서울의 하늘도 제법 예쁘죠?

 

내가 초등학교 4~5학년 때의 일로 기억된다.

학교를 파하고 집에 가기 위해 서있던 버스 정류장에서 1년 선배 몇이서 머리를 맞대고 속닥거리는 모습을 본 나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 틈으로 끼어들었다.


나의 등장에 살짝 당황한 듯한 선배들의 제스처...


“뭔데?”


나의 물음에 선배 하나가 두 손아귀 안에 무언가 감추고 있던 것을 절대 보일 수 없다는 듯 더욱 꼭 움켜쥐는 것이 보였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지 않는 나를 보더니 인심이라도 쓰듯 선배가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붉은색의  복주머니처럼 풍성한 모양의 꽈리 열매가 모습을 들러내었다.


“뭐야... 꽈리잖아...”


실망한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냥 꽈리 아냐! 이 주머니 안에 꽈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요정이 들어있어. 그치? 니들 봤지?”


꽈리의 주인인 선배가 발끈해서 나의 말을 되받아쳤다. 그 말에 선배의 친구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요정이 어디 있어? 그건 동화에나 나오는 거잖아...”


그 말을 믿을 수 없던 나... 아니 요정의 실체에 대해서 확실한 부정을 할 수 없었던 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꽈리 주머니 속을 꼭 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일었다. 내 마음을 꿰뚫었을까? 선배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


“마음이 나쁘거나 요정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요정을 보여줄 수가 없어. 그럼 요정이 죽어 버리거든. 그치, 얘들아?”


선배의 친구들이 만장일치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버스가 오는 바람에 나는 아쉽게도 꽈리 속에 요정을 볼 수 없었다.

얄밉도록 보여주지 않는 선배가 미워서,

“세상에 요정이 어디 있어서 죽냐? 거짓말쟁이들...”

하고 마지막 말을 남겼지만 나는 그날 이후 잠들지 못하는 밤마다 꽈리 속의 요정을 만들어내어 동화 속 나라를 돌아다니다 잠 속에 빠져들거나 꿈속에서 요정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서 잊혀 진 옛 일이 어제 일처럼 또렷이 떠오른 것은,

삼일 전 [낙지 수제비] 집의 화단에 예쁘장하게 열매를 맺은 덜 익은 꽈리를 보고 나서였다.


발칙한 선배들의 거짓말로 오히려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었던 옛일이 떠오르자 웃음이 삐져나왔다.


얼마 전 친구들과 먹은 수제비가 너무 맛이 있어서 아들이 학원가고 한가한 오후, 아영이와 함께 들른 <수제비 집> 한쪽에 자전거를 대놓다가 발견한 꽈리를 본 몇 초... 누가 볼까 슬쩍, 이제 막 색을 띄기 시작한 꽈리 열매 하나를 따서 얼른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맛있게 수제비를 먹고 돌아온 집.

욕실에서 깨끗이 손발을 닦고 나오는 아영이를 불렀다.


“아영아!”

“응. 왜 엄마?”

“요정은 믿지 않으며 살아나지 못한다는 거 알지?”

“응.”

“엄마가 선물을 줄 거야. 엄지 공주에서 나오는 것처럼 작은 요정을...”

“!!!...정말?!”


놀란 아영이의 크지 않은 눈이 동그래졌다. 살짝 뜨끔+부담감이 밀려들었다.


“엄마가 거짓말 하는 것 봤어?”

“아니...”

“그러니까 정말이지... 눈 감고 손 내밀어봐.”


흥분을 가라앉히기 힘든 듯, 들뜬 아영이가 눈을 질끈 감더니 숨을 몰아쉬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나는 호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꽈리 열매를 아영이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이게 뭐야...?”

“요정 주머니지.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요정 주머니야. 사랑을 많이 주면 아주 진한 빨강색이 되면서 예쁜 요정이 태어난다.”

“엄마, 하늘에 맹세해?”

“그럼. 그런데 네가 꼭 지켜야 할 것이 있어.”

“뭔데?”

“이건 엄마와 너, 둘만의 비밀이어야 해. 누구에게 말하면 요정은 생기지 않아. 그리고 예쁜 마음이 전해져야 한다. 오빠와 싸워도 안 되고, 짜증내고 울어도 안 돼. 어느 것 하나도 지켜지지 않으면 요정은 생기지 않아.”


요즘 부쩍 고집이 세진 아영이가 사춘기로 접어 든 제 오빠의 심기를 건드려놓고도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 대들다가 맞는 때가 많았다. 기회도 찬스라는 생각에 그동안 여러 번 말을 해도 쉬이 고쳐지지 않는 아영이의 단점만을 끄집어 낸 조건들이었다. 아영이 역시 살짝 고민을 하는 듯 했다.


“네. 오빠랑 안 싸우고, 비밀 말하지 않고 짜증내지 않을래요. 그럼 정말 요정 생겨요?”

“너, 자꾸만 정말, 정말 그러면 못 믿는다는 얘기야?”

“아니아니... 믿어요.”

“그럼, 이것 너만 볼 수 있는 곳에다가 잘 보관 해 놔. 아주 진한 주황색이 되면 요정은 나타난다.”


아영이는 그것을 장식장 안에 있는 찻잔 속에다 고이 모셔(?) 놓았다.

내성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비밀이 없는 아영이는 묻지 않아도 좋아하는 남자애 이름까지 발설하는 무겁지 않은 입의 소유자.

그런 성격이 며칠이 지났건만 꽈리에 대해서 발설하지 않는 것이 기특할 정도다.


요 며칠, 꽈리 덕분에 내 목소리가 창밖을 넘어가는 일이 조금은 줄어 든 듯하다.

아침에 깨우면 짜증을 내며 징징거리고 꼬박꼬박 말대답하는 아영이에게 난 이 말만 한다.


“그렇게 못되게 굴면서 뭐가 태어나기를 바래?!”


이 한마디에 바로 잠잠해지는 아영이.

아들은 제 엄마의 이상한 말에 궁금한 듯 몇 번 물었다.


“엄마, 뭐가 태어나는 대요?”


그 질문에 애매해할 순간도 없이 나는 아영이의 손에 의해 입이 틀어 막혀지곤 한다.


아영이가 요즘 즐겨 읽는 동화책이 <엄지공주> 다.

벌써 몇 번을 읽는지...

저녁나절이면 매일 학교 운동장을 몇 바퀴씩 돌고 있는 내 곁에서 아영이도 따라 걷는다.

피곤해서 어느 때는 쉬고 싶은데 고집 껏 나를 끌고 나가는 아영이...

이유인즉, 이야기를 듣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인 것이다.


어릴 때 억지로 책을 읽혔던 아들은 책을 점점 멀리했다.

그것을 거울삼아 아영이에게는 책 읽기를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잠들기 전이나 운동장을 돌때면 내가 어릴 적, 재미있게 읽었던 <빨강머리 앤> 이나 <캔디>... 때로는 즉석 창작동화(?)를 이야기 해주곤 하는데 여간 반응이 좋은 것이 아니다. 제 스스로 없는 책을 빌려달라는 이야기를 할 정도니까.


어제는 제법 색깔이 진해진 꽈리를 꺼내 와서 아무도 몰래 내게만 살짝 보여주고 제자리에 갖다놓는 딸.


내 거짓말로 아영이의 예쁜 상상의 나래가 방대하게 커졌으면 좋겠다.

그것을 토대로 더 많은 것을 대하고 접하고 배웠으면 좋겠다.


꽈리가 썩지 않고 예쁘게 익은 후, 당연히 생겨나지 않을 요정에 대해서 나는 뭐라고 또 거짓말로 둘러대야 할까?

이런 제 엄마가 거짓말을 절대로 안한다고 믿는 아이들...

뜨끔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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