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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미혼모의 행복한 출산기


BY 불토끼 2006-09-07



‘나 할머니됐어!’

사장님이 어느날 가게문을 들어서자마자 가게가 떠나가라 소리쳤다.
이 무슨 변고인가. 할머니라니? 사장님에겐 26살, 24살 두 딸이 있지만 둘다 아직 미혼이다. 하나는 멀리 독일남서부의 대학에서 지리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고, 다른 하나는 지구촌을 트럭타고 떠돌아다니는 히피다. 할머니가 됐다는 건 이 둘중에 하나가 임신했다는 말인데 그럼 누가?


알고보니 맏딸 크리스티나가 클럽에서 만난 남자랑 하룻밤 잤다가 덜컥 임신을 한 것이었다.
우리나라같으면 처녀가 임신했다는 얘긴 어떻게 해서든 덮어두고자 할텐데 여기 독일에선 안그런가 보다. 사장님은 어떻게든 자기 신상에 변화가 일어났다는게 아주 신이나는 모양이다. 그러면서 자기딸이 임신한 경위를 내게 세세하게 얘기해 주었다.


크리스티나는 주말을 맞아 엄마가 있는 함부르그에 놀러왔다가 친구들과 나이트클럽엘 가게되었는데 거기서 어떤 남자를 만나 하룻밤 잤다가 임신이 됐단다. 엄마가 보기에 남자가 증권회사에 다니니 직장도 괜찮고 집안도 그만하면 괜찮고 해서 웬만하면 아기를 위해서라도 둘이 결혼했으면 했지만 딸은 한사코 결혼을 거부했다. 그 남자는 자기취향이 아니므로 아기가 태어나도 아기아빠로서만 대할 뿐 자기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싶지 않단다.


엄마 마음으로는 딸이 이렇게 반응하는 것이 여러모로 아쉽다. 자기 딸은 이제 곧 석사논문만 제출하면 학위를 받게되고 그러면 앞길이 창창한 스물여섯아닌가? 이 청춘에 아이에게 매여서 살 딸을 생각하니 아니할 말로 차라리 낙태를 시켰으면 좋겠지만 크리스티나는 미혼모가 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결정하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일단 결정하고나니 둘다 오히려 홀가분한 눈치다. 우리 사장님은 직원들에게 자기가 곧 할머니가 된다는 사실을 말했고 일가 친척과 친구들에게 전화해서 맏딸이 임신했음을 알리는 한편, 알음알음 알고 찾아온 사람들이나 손님들에게 축하인사를 받느라 정신이 없다.


독일에서 미혼모가 된다는 것은 이렇듯 우리나라에서 미혼모가 된다는 것과는 천지차이다. 그 일화로 내가 처음 독일에 도착하여 어학원에 등록했을 때였다. 자기소개 순서에 우리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저는 누구누구이고, 몇 년간 이 학원에서 선생노릇을 했으며, 딸이 하나 있습니다.
결혼은 아직 안했구요.”


우리나라에선 통상 ‘결혼했어요?’ 다음에 오는 질문이 ‘아이는 있어요?’ 이겠지만 독일에서는 ‘아이는 있어요?’ 다음에 ‘결혼했어요?’가 오는 수도 허다하다.


미혼모가 되면 엄마가 일정한 수입이 없을 경우 통상 집세와 양육비, 생활비조로 100만원이 넘는 돈이 정부에서 나온다. 집세 30에서 50만원선(집의 크기에 따라 틀리다), 실업급여 성인 40만원, 미성년자 30만원, 아기양육비 20만원 여기에 무료 의료보험 혜택이 따라온다. (이 액수는 주마다 틀린다.) 게다가 아기 아빠되는 이가 의무적으로 양육비를 내야한다. 그러므로 미혼모라 할지라도 아기가 자랄때까지 엄마는 밥벌이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배가 불러오면서 크리스티나는 거처를 엄마가 있는 함부르그로 옮겼다. 사장님은 몸이 무거운 딸을 대신하여 아기와 예비엄마를 위한 방 2칸짜리 월세집을 장만해주었고(사장님댁에 방이 남아돌지만서도) 아기용품을 사모으거나 주워모으는데 정신이 없다. 어느덧 사무실엔 하루가 다르게 손님들이 두고간 아기 목욕대야, 유모차, 모빌등이 쌓였다. BMW를 몰고다니며 연못이 있는 집에서 사는 사장이 남이 쓰던 중고 아기용품을 받고는 어찌나 좋아하던지 연신 내게 물어본다.


“이거 완전 새거같지?
애많은 오졸링부인한테서 공짜로 얻은거야.”


게다가 한동안 손에서 놓았던 뜨게바늘을 다시 손에 쥐고 아기 이불을 뜨고, 아기 저고리를 뜨고, 아기 양말을 뜬다. 좋아서 입이 찢어지는 품이 흡사 이 여자가 나이 50에 늦둥이를 임신했나 할 정도다.


이렇게 오랜 준비가 끝난 어느 봄날 오후, 드디어 아기가 태어났다.
아기의 이름은 요한나로 지었다. 요한나가 태어나는 날엔 양가부모와 친척들이 병원에서 아기의 출산을 기뻐해주었다. 남자쪽에선 정식으로 결혼한 사이가 아니더라도 아기의 아빠이므로 법적으로 양육비를 댈 의무가 있었다. 요한나가 태어나고 얼마후 유전자 테스트를 거쳐 아기의 생부임을 확인한 아빠는 달달이 얼마간의 양육비를 내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렇게 해서 크리스티나는 엄마가 된 것이었다.
임신했을 때만 해도 석사논문 쓴다고 정신이 없었고 아기를 낳아도 최소 6개월안엔 석사논문을 완성한다고 장담하던 크리스티나는 엄마가 되더니 공부는 뒷전이었다. 사장님이 이제 우리딸의 전공은 지리학이 아니라 아기학이 되었다고 말할 정도로.


애초에 사장님은 걱정이 좀 많았다.
딸이 워낙 친구가 많고 노는걸 좋아하는지라 얘가 엄마노릇을 잘 해낼까, 자기 청춘이 아기 때문에 끝났다고 우울해하지 않을까, 혹은 아기를 팽개쳐놓고 놀러다니지나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그것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아기가 생기자 마자 크리스티나는 문밖출입을 삼가고 하루종일 아기 옆에 붙어 앉아 아기돌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기가 깨어있을 때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아기를 앞에두고 하루종일 얘기를 해줬고, 아기가 잘때는 인터넷을 뒤져 아기키우기 정보를 찾거나 아기옷을 뜨기에 바빴다.


가게에 잘 나오지도 않던 그녀는 엄마가 된 후 자주 아기를 데리고 가게로 나왔다.
오졸링부인한테 얻은 빨간 유모차에 요한나를 태워서 아기자랑하러 나온거다. 요한나가 도착하면 우리 가게는 훨씬 생기를 띤다. 모든 사람들이 아기를 둘러싸고 예쁜 아기 칭찬하기 시합이 붙었다. 요한나가 갈때까지 직원들은 일손을 놓고, 손님들은 자기가 뭘사러 왔는지를 잊는다. 모두들 아기구경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녀는 말끝마다 엄마가 된 것이 석사논문 통과한 것보다 백배이상 기쁘다고했다.


그녀와 요한나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자면 때때로 나는 놀라게 된다.
아기가 과연 한 여자를 저렇게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한 여자의 인생을 저렇게 바꿔놓을 수도 있을까 하고. 모르긴 몰라도 아기엄마가 된다는 것은 종교에 귀의하여 새로운 세상을 접하게된 이의 기쁨 이상인 것 같다. 그러면서 지금껏 한번도 아기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던 이 서른여섯의 나는 이렇게 생각해보기도 한다.


‘아기를 낳으면 정말 저렇게 행복할까? 나도 늦기전에 그 경험을 해봐야 하는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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