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영님 글을 읽으면서 감정이입이 너무 잘 되었다...
도영님의 시부모님이 꼭 돌아가신 친할아버지의 성정과 비슷하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 물론 우리 친할아버지가 며느리 구박 선수권대회에 나가면 입상권에는 들라나
그건 모르겠다...
하지만 며느리는 새로 들어온(하늘에서 내린) 임기무한대의 무보수의 가정부에다가,
약간의 가학성을 띠고 대해도 전혀 나라에서 뭐라고 안할 오히려 장려해줄 오히려 그런
피학적 상황을 즐긴다고 여겨지는 원식구보다는 약간 하등한 태생의 영장류로 여긴다는 점,
약주를 많이 즐기셨다는 점(할아버지는 주로 집에서 반주로 꼭 드시고, 어린애 젖병 찾듯이
어디 앉으시면 항상 술상이 따라야 했다.)
조용하고 침묵을 금으로 여기시기 보다는 할말을 꼭 해야 직성이 풀리시고 오히려 그 이상
하시고 노인네치고 기력이 왕성하셔서 농사일도 부지런하시고 가고 싶은 곳 가셔야 하고
활달하신 편이었던 것 같다. 한마디로 다혈질이셨다...
반면 할머닌 말씀이 별로 없으셨다... 그렇다고 할머니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부처님같으셨다면 얼마나 좋을고... 평소 엄마가 할아버지하고는 살 수 있어도 할머니와는 살기 싫다고 할만큼 할머닌 특이한 구석이 있으셨다... 건강이 나빠서 그랬겠지만 여자로서 할머니의
살림솜씨는 빵점에 가까왔다... 원래 못하신데다가 영 취미가 없으신 듯 했다... 할머니의 살림 이야기는 전설적이지만 이만 묻어둘란다... 그러니 며느리 들이기만을 학수 고대하셨을 것이다... 맘대로 부려먹을 수 있는 전용 가정부...
살림을 못하셔서 근처 사는 네 며느리가 쥐 풀방구리 드나들듯 하면서 살림을 살아드려야
생활이 가능하셨다... 며느리들은 어깨너머로 시어머니 살림솜씨도 배워가면서 분위기도
익히고 시어머니와 정도 붙이고 할텐데... 이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는 그저 돌봐드려야 하고
가려운데 긁어드려야 하고 공경해야 하는 그런 존재였다...
그 네 며느리 중에도 우리 엄마가 맏며느리였으니 엄마의 어깨가 가히 무거웠을 것이다...
막네 삼촌이 다섯살 때 시집을 왔으니... 장가안간 어린 시동생들은 또 얼마나 형수에게 부담을 줬을까...
엄마의 친정은 시집간 곳에서 불과 20-30리 떨어진 가까운 곳이었으나 훨씬 도회스러운
문명이 존재하는 읍내였기에 큰 길에서 밭둑길을 한참 걸어들어가야 나오는 야트막한 산 밑 그늘에 옹기종기마을을 이룬 조용하다못해 고적하기까지한 새로간 시집이 황당했다고 한다...
차도 한 시간에 한번 들어올까 말까하지... 우물도 공동우물에서 물도 길어와야 하지..
거기에다 다섯오빠 밑에 뚝 떨어진 외딸이니 올케들 땜에 살림도 거의 안하고 시집을 왔겠지... 귀염과 관심만 받다가 시집이라고 오니 온통 자신의 노력봉사만 입벌리고 기다리고
있으니 암담했을 것 같다...
서울의 고학생인 아버지가 떨구어놓고 간 시집에서 홀로 시집살이하다 아버지와 거의
도망가다시피 서울로 올라가셨다 한다... 거기서 육년만인가 칠년만에 다시 귀향하게
되었는데(직장 관계로) 그 때 엄마는 가기가 싫어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기분이었을 것이다...
고향땅에서 집은 따로였지만 일주일에 한두번은 꼭꼭 할아버지댁에 일을 도우러 가셨던 것 같다... 농사철에는 덩달아 바빠지고... 집에 있던 우리는 덕분에 점심을 건너뛰어 허기진 배를 쥐고 엄마만 해질 때까지 기다렸던 기억도 난다...
엄마는 호시탐탐 시댁과의 연결고리에서 벗어날 궁리만을 했었나 보다... 항상 서울 서울..
노래를 해서 서울은 자유가 뛰노는 꿈의 땅이었다... 아빠 직장도 거기인데... 항상 서울에서
다시 사는 꿈을 꾸었다... 하나뿐인 아들이 아프자 그 꿈이 더욱 거세게 들고 일어났다...
모두의 이목과 시댁의 사정권 안에 사는 부담을 떨치고 자유롭게 살고 싶었나 보다... 또 한번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는 사십에 접어든 엄마의 나이와도 무관하지 않았으리라...
그 꿈은 내가 대학 입시를 치루어 놓고 표면화되었다... 아이들 교육 뒷바라지를 구실로 고향을 뜨고 싶어했다... 아빠는 기러기 아빠로 두고... 당연히 할아버지는 그 다혈질 성품을 못 이겨 못 말려서 안달이 나셨고... 맏며느리가 탈출을 꿈꾸다니 괘씸하기 짝이 없으셨겠지...
입시를 치루고 몇일도 안 지난 어느날 모처럼 친구와 극장에 가려고 집엘 먼저 들렸다...
할아버지가 와 계셨는데... 그 일로 엄마와 말다툼을 하셨었나 보다... 친구와 내가 보는
앞에서 술상을 엎으셨었다... 안주로 나와 있던 새빨간 초고추장이 이리 저리 튀었던 것 같다... 얼마나 놀랐는지... 난 항상 새초롬하고 냉정해보이기까지 한 아이였는데 친구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여서 얼마나 부끄럽던지... 할아버지가 너무 원망스럽고 미웠었다...
엄마는 내가 서울로 올라올 때 같이 못 왔다... 그 날 그 일로 의지가 잠시 꺾였었나 보다...
하지만 동생이 대입을 한 2년 후에 동생들과 기어코 올라오고야 말았다...
그 때 입시만 마치고 이사했는데 동생이 대학에 떨어졌다면 또 한바탕 난리가 났었을 거라며
엄마는 나중에 안도의 한숨을 들이쉬었다...
아닌게 아니라 그 때 막내 삼촌이 내게 했던 말이...
\"@@가 대학 떨어졌다면 느그 엄마 아마 쫓겨 났을거라...\" 였다.
엄마는 자유를 찾아 서울에 왔는지 몰라도 난 엄마의 쓰잘데기 없는 참견과 구속으로
고통을 받아야 했고 상처를 입었다... 스트레스가 어디로 갔겠는가...
가끔씩 할아버지가 올라오셨지만 난 할아버지를 반기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었다...
그 땐 정말 철이 없었다... 날 창피하게 만든 데다가...
엄마와의 관계가 이후로 계속 악화 일로이니 가재는 게편이라고 엄마의 마음 고생을
할아버지 탓으로 돌리고 나니 손녀의 할아버지에 대한 마음도 좋을 수가 없었다...
그 때는 할아버지가 너무 하신다고 생각을 했었다... 왜 그런 부분이 없었겠냐 만도...
어른의 역활이 더 크지 않을까 싶지만도 지금은 잘 모르겠다...
다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전 병상에 누워계실 때 마지막 찾아간 나를 향해
손을 내미셨을 때 왜 그 손을 덥석 잡아드리지 못했을까... 회한과 후회만 남을 뿐이다...
참 불효했다...
나중에 그 일로 참 많이 울었다...
손녀와 할아버지의 인연이 보통 인연은 아닐진데...
꼭 사죄드리고 싶다... 너무 잘못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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