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 깨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어 젖혀도 아침 공기만의 시원하고 경쾌한 기운을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그 무더웠던 8월은 지나고 이제 청춘 남녀의 연애사업의 결과를 알리는 결혼시즌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 집 냉장고 옆 달력에도 9월 달에만 동그라미가 두 개나 그려져 있다. 점심을 먹고 난 토요일 오후, 돌을 갓 지난 아들, 산이는 잠이 오는지 눈을 계속 비비고 있고, 남편은 일찍이 친구 결혼식장에 가고 없었다. 아들이 잠자는 시간은 밀린 집안일을 하거나, 인터넷을 보거나, 친구와 전화로 수다를 떠는 나의 유일한 자유시간이지만, 이날은 점심을 먹은 포만감과 창문으로 들어오는 볕 때문인지 아들을 재우면서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다.
대학 캠퍼스 벤치에 앉아 친구들과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며칠 있으면 다가올 방학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2년 내내 나를 짝사랑해오던 ‘구태’라는 같은 과친구가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구태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친구들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었는데 구태가 내게 가까이 걸어올수록 그의 뒤로 노란 타원형 모양의 후광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는 것이었다. 너무 눈이 부셔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구태의 얼굴에선 자만 섞인 미소가 새어 나왔고,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열쇠를 내게 내밀었다.
“이게 뭔데?”
“차 열쇠다. 그동안 네 차 얻어탄 보답이라 생각해라. 이쪽으로 따라와봐.”
구태를 따라간 곳엔 빨간 외제차 한대가 빛을 내뿜으며 서있었고, 통학용으로 산 나의 빨간 중고 티코가 바로 그 뒤에 있었다. ‘빨간색’이라는 같은 단어로 이 두 대의 차의 색을 표현하기에는 시각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어 보였다.
“와! 같은 빨간색인데도 어쩜 이리 틀리니? 나 이거 타봐도 되?”
“그럼, 이젠 네 건데.”
나는 조심스레 차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 내 몸에 꼭 맞춘 듯 발끝까지 전해오는 안락함이 느껴졌다. 빨리 시동을 켜고 달리고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머리가… 머리를 앞으로 숙일 수가 없었다. 뒤 돌아보니 머리카락 한 뭉치가 차 문틈에 끼워져 내 머리를 자꾸 당기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빼낼려고 할수록 점점 아파왔다. 너무 아파서 감고 있던 눈을 떠보니 산이가 내 머리맡에 앉아 베시시 웃으며 머리카락을 당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산이야, 엄마 머리 좀…… 좀 놔봐.”
멍하니 일어나 앉아 머리를 매만졌다. 낮잠이 부족했는지 머리가 아파왔다. ‘구태가 꿈에 나오다니 완전 개꿈이네. 얼굴 못 본지 6년이나 지나도록 한번도 떠올려 본 적 없었는데 꿈에 다 나오고 그래.’ 대학 때 나를 좋아한단 이유로 내게 정신적 스트레스를 줬던 구태가 반가울리 없었다. 그러다 잠깐, 지금 걔는 뭘 하며 사는지 아주 잠깐 궁금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3시가 다 돼갔다. 휴대폰으로 남편에게 전화를 걸으니 경춘국도가 막혀서 5시쯤 집에 도착할 것 같다 했다. 전화를 하는 동안, 산이는 오리걸음으로 건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조용한 것이 수상해 들여다 보니 오늘도 어김없이 책상 맨 아래칸에 있는 책들을 하나씩 꺼내고 있었다. 몇 번이나 못하게 말렸더니 오늘은 맘먹고 앉아서 저지레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 책 맨 앞에 있던 작은 상자까지 꺼내 열려고 하였다.
“산아, 그건 안돼. 하지마.”
상자를 얼른 뺏으니 산이는 ‘우왕~’하며 큰 소리로 울어 젖혔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상자를 들고 거실로 나와 버렸다. 사실 상자 안에는 그다지 중요한 것들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산이가 쉽게 구겨버리고 찢을 수 있는 사진들과 편지가 들어 있었는데, 사진은 내가 결혼하기 전, 부모님 젊었을 적 사진과 흑백 결혼 사진을 몇 장 챙겨 뒀던 것이고, 편지는 내가 나에게 쓴 것이었다. 편지 겉봉투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 FROM. 1991년 2월 13일 수요일 17세의 나
TO. 2001년 27번째 생일을 맞는 나 』
2001년에 볼 편지라면 이미 5년이나 지나지 않았는가? 사실 2001년도 내 생일날 나는 이 편지를 기억하고 있었고, 그날 편지를 뜯어 읽었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어도 내가 직접 쓴 편지라 굳이 뜯지 않아도 그 내용이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단지 기억력이 좋아 편지를 읽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그 편지를 읽고 씁쓸해 할 내 자신이 싫어질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봄방학을 앞두고 한 학년을 끝마칠 무렵에는 선생님들이 진도를 나가기 보다는 학생들 각자에게 읽을 책을 가져오게 한다거나, 장기자랑을 하거나 각 반 특성에 맞게 자유시간을 가지곤 했다. 그날 국어시간에도 우리들은 선생님이 수업을 하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지난 시간에 선생님이 편지지하고 편지봉투 가져 오랬지? 다 준비해 왔지?”
“네.”
“이제부터 편지를 쓸 건데, 누구한테 쓰는 것이 나면….. 10년 후 너희 자신들에게 보낼 편지를 쓰는 거다. 형식은 그냥 자유롭게 쓰면 되. 너희 맘대로 말이야. 물론 발표할 필요도 없고”
“편지 쓰고 나면 이 편지를 어따 부치는데요?”
“편지 쓴 후에 잘 봉해서 너희 스스로 간직하는 거야. 절대 10년 전에 열어 보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면서 말이지.”
마냥 사춘기 소녀일 것만 같던 내게도 27살이라는 그런 나이가 과연 찾아 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하기 전에 지금 내 꿈은 무엇인지부터 곰곰이 생각해 봐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 꿈이 뭔지 나도 잘 몰랐다. ‘그래, 거창한 꿈말고 내가 어른이 돼서 무엇을 하면서 돈을 벌고 싶은지 써보는 거야.’
10년 후의 영란이에게
안녕? 난 17살 영란이야. 27살 영란이 너는 요즘 어떻게 지내니? 너의 영원한 숙적이었던 여드름도 없어지고 많이 예뻐졌겠지? 대학 졸업 후에 광고 회사에 취직했다면서? 예전부터 너 광고 보는 거 좋아하더니 결국엔 그 쪽에서 일하게 됐구나. 텔레비전에서 드라마나 뉴스 끝나면 광고 보기 싫어 여기저기 채널 돌리는 사람들과 달리 넌 광고를 재미있어 했잖니? 난 요즘 TV를 보다가 네가 만든 재미있는 광고가 나오면 내가 다 흐뭇해진단다. 더 참신하고 기발한 광고를 만들기 위해 책도 많이 읽고, 여러 사람들과도 어울리고, 여러 곳을 여행하길 바란다. 참, 그리고 네 단짝 친구 지은이는 동물을 그렇게 좋아하더니 수의사가 됐다면서? 불쌍하고 가여운 동물들 많이 보살펴 주라고 전해주라.
그리고 이 편지를 읽고 나면 지금부터 10년 후인 37살인 영란이에게도 편지를 써주길 바래. 늘 행복하고 당당하게 네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아 기쁘다. 그럼 이만 쓸게. 안녕!
p.s 근데 너 결혼은 했니?
1999년 2월 13일 국어시간에
17살 영란이가
“너 꿈 뭐라고 적었어?” 내 편지를 슬쩍 엿보며 짝 지은이가 물었다.
“응, 광고 회사에 다니고 있는 걸로 했어.”
“엥~뭐야? 기껏 꿈이 회사원이란 말야?”
“그냥 회사원이 아니라 광고인이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네 얘기도 적었다. 수의사로…”
27살이 되어서 이 편지를 읽으며 마냥 흐뭇해하고 가슴 벅차할 내 자신을 상상해가면서 나는 편지지를 정성껏 접어 편지 봉투에 넣었다.
편지를 읽는 동안 산이는 벌써 편지봉투를 접수해 신나게 빨고 있었다. 비록 지금의 나는 편지 속의 꿈과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불구덩이 속에라도 대신 뛰어들 수 있을 만큼 사랑하는 나의 아들과 내 인생 끝까지 함께 할 남편이 있어 행복하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다 뒤를 돌아보다가도 남편과 아들이 깔깔거리며 노는 모습에 난 작은 행복을 느끼곤 한다. 꿈이 꿈인 줄 알려면 그 꿈에서 깨어나야 하듯 나는 오늘 멋진 자동차를 선물로 받는 꿈에서, 그리고 17살 소녀의 꿈에서 깨어났다. 잠자는 동안에 실지로 보고 느끼듯이 머리에 그려지는 것, 실현될 가능성이 적거나 아주 없는 기대나 생각, 앞으로 이룩하려는 희망이나 이상…. 이 세가지가 꿈의 사전적 의미란다. ‘실현 가능성이 없는’이라는 대목에서 꿈이 확 깨버릴 것만 같다. 꿈이란, 끝없이 원하고 노력하면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다시 정의해 놓고 싶다.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집 앞에 거의 다 도착했다며 산이를 데리고 나오라 했다. 우리 집 주간 행사가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밖에 나가보니 남편은 이미 도착해 담배 한대를 입에 물고 있었다. 결혼하면, 나 임신하면, 아기가 태어나면 담배를 끊겠다고 미뤄오더니 결국 산이가 태어나 돌이 지나도록 저 놈의 담배는 끊을 수가 없나 보다. 우리 세 식구는 복권방으로 향했다.
“여보, 나 오늘 낮잠 자다가 자동차 선물 받는 꿈 꿨는데, 로또가 좀 될래나? 일등 되면 아버님 시골집부터 옮겨 드리자구요.”
나는 또 다시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