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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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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개꿈도 꿈이건만


BY 蓮堂 2006-09-06

 


시골에서 초등학교 일학년을 다녔다. 오빠들을 따라서 시오리길을 타박걸음으로 일년간 다니고 보니 학교 가까이 사는 친구들이 부러워서 학교 앞에 사는 꿈을 꿀 때가 많았다. 그 꿈은 자식 교육을 최고의 결실이라고 생각하신 아버님의 의해서 마침내 현실로 이어져 읍내로 - 학교 가까이 - 이사를 해 더 이상 부러울 게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장사를 하시는 초라한 아버님 보다는 버젓한 양복입고 출퇴근 하는 친구들의 아버지가 부러워서 우리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하는 모진 생각을 했던 죄로 얼마 전에 돌아가신 아버님 영정 앞에서 볼 살이 벌겋게 데이도록 뜨거운 눈물을 쏟아야 했다.

정수리에 머리털이 뽑히도록 물을 길어 나르는 게 싫어서 물 펌프 있는 집으로 이사 가는 게 소원이었던 기억은 상수도가 들어올 때까지 숱하게 꾸었던 꿈이었다.

나를 꾸중 하시는 엄마가 미워서 연탄아궁이 옆에서 쭈그리고 앉아 연탄가스에 질식해 죽었으면 했었다. 그러므로 해서 나를 야단 친 엄마가 아버님과 할머님에게 야단맞고 나에게 미안해서 줄줄 울면 참 고소하고 속이 시원 할 것 같았다. 이보다 더 큰 소원은 당시에 유행하던 순정만화의 여주인공처럼 돈 많은 진짜 친 엄마가 나타나 대궐 같은 집에서 호의호식 하며 사는 신데렐라 같은 공주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길러준 엄마에게 보란 듯이 자랑 하며 으스대고 싶었던 기억은 내가 자식을 기르면서 가졌던 엄마에 대한 죄책감 중에 하나였다.

그렇게 시나리오를 쓰고 꿈을 꾸게 된 데에는 아동소설 - 콩쥐팥쥐나 신데렐라 혹은 백설 공주 같은 - 과 순정만화에 심취한 나머지 맹랑한 독서 병을 앓는 중이었던 것 같다. 

중 고등학교에 가서는 왕복 두 시간 타는 기차 통학보다는 호랑이 같은 아버님을 벗어나서 혼자 밥 해 먹고 학교 다니며 내 맘대로 휘저으며 살고 싶었고 졸업을 하고 서울로 올라가 취직해서 서울말 쓰며 멋진 남자 만나 연애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보수적인 아버님 시야에서 한시도 벗어나지 못하고 아버님 곁에서 직장 다니며 모든 꿈과 희망을 접어야 했다. 뒤집어 말하면 죄스러운 생각이지만 아버님은 내 꿈과 희망의 걸림돌이었고 훼방꾼이었다. 그때 맘으론 그랬다.

공직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뾰족한 방법이나 대책도 없이 난 항상 달아나고 벗어나서 넓은 세상을 멋들어지게 살 궁리를 하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넓은 세상엔 나를 위한 만찬이 차려져 있어서 수저 들고 먹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우물 안을 벗어나 보지 못한 개구리가 세상 밖의 넓이나 깊이를 알 턱도 없었고 막상 벗어난다고 해도 씩씩하게 살아 낼 자신도 없었다. 온실 밖이 얼마나 춥고 험한지 살아보지 않아도 언론이 찔러준 귀동냥에 지레 겁을 먹고 움츠려야 했다. 그러다가 아버님의 커트라인에 걸린 남편을 만나 그럭저럭 살아온 게 스물 하고도 다섯 해를 꼬박 채웠다.

접어놓고 단 한번 펼쳐보지도 못했던 숱한 꿈의 고리들을 남편의 목에다가 걸어놓고 매 달려 보려 했지만 층층시하에 숨죽이며 살 때부터 내 바람은 하나하나 거품 사그라 들 듯이 꺼져 버려 꿈이라든지 희망은 사치에 불과했고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핑크빛은 소설속이나 드라마에 내걸린 남의 얘기란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거북한 시집살이는 현실과 꿈 사이를 분주하게 드나들었다.

연이은 시집행사와 맏며느리의 본분에 덜미가 잡혀 고단한 잠 이루던 날은 어느새 편안한 막내며느리가 되어 있었지만 꼬집힌 넓적다리는 아프지 않았다.

두 아이 떼어놓고 보따리 싸들고 대문턱을 넘었지만 소스라쳐 깨어보니 내 품에서 잠든 아이의 곤한 숨소리를 듣는 순간 다행스러움과 죄책감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벌겋게 부은 눈자위는 아침까지 가라앉지 않아서 가족들을 똑 바로 볼 수가 없었던 민망한 기억은 두고두고 나에 대한 흠집이었다.

넉넉지 않은 시댁 살림이 힘들 땐 미련 없이 사표 던진 공직에 복직 발령을 받고는 꿈인 줄 알면서도 분하고 아쉬운 맘에 깨어나기 싫어서 이미 달아난 꿈 끄트머리를 잡고 미련을 떨기도 했다.

숨이 막힐 듯이 힘들고 암담한 현실을 벗어나는 것만이 유일한 꿈이라면 꿈이었지만 운명이나 현실을 거부할 만큼 난 아둔하지는 않았다. 나만 이렇게 사는 게 아니고 다들 그렇게 사려니 하는 체념이 회의나 좌절감에 빠지지 않도록 그나마도 나를 지탱 해 주었다.

굳이 탓을 하려면 내자리가 꿈을 꾸고 좇을 만큼 편안하고 널찍한 게 아니었으므로 누군가에 의해서 뭉개진 게 아니고 나 스스로가 알아서 밟아 버렸다고 해야 옳겠다.

그러던 것이 나이가 들면서 ‘자아(自我)’에 대한 강한 의구심과 또 다른 억울함이 서서히 머릿속에서 튕겨 나왔다.

‘끼가 많고 재주가 많은 사람인데 그 끼를 발휘 못하고 삭히며 누르고 사느라고 나름대로 마음고생을 하고 사는 스타일’ 이라는 몇몇 사람들 특히 철학자를 자처하는 점쟁이나 스님 그리고 나를 아는 지인들이 부채질 해 준 귀 얇은 한마디에 그만 속을 드러내고 말았다.

나는 그동안 무엇이었나..............

나의 실체에 대해서 체념하고 살아온 세월들이 왜 그렇게 분하고 억울하게 가슴을  두드려대는지 모르겠다.

난 나 자신이 결혼 전이나 후에도 누르고 눌리고 옥죄여서 사는 건 인정을 했지만 끼가 있고 재주 많다는 생각은 꿈에도 드러낸 적 없이 주제 파악에 충실하며 살았는데 족집게 같이 집어 준 그 한마디가 불씨가 되어 서서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난 할 수 있는 게 많은 사람이고 재주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흙 속에 파묻혀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하릴없이 시간만 죽이고 매듭 없이 시류에 휩쓸려 나가는 줄 모르고 밋밋하게 산 바보가 아니던가.

꿈 없이 산 밋밋한 바보 보다는 그래도 늦으나마 꿈을 가진 척 흉내라도 내 봐야 남의 말 틈에 끼일 수 있는 센스 있는 사람 축에 들 것 같았다.

특별난 재주나 능력도 없이 무책임하게 던졌을 법한 남의 말 한마디에 주술이 걸려 진주라도 된 듯 어깨를 펴고 목에 힘을 주어 보았다.

그러나 사방을 돌아보아도 쉰을 넘긴 중년의 촌 여자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이란

눈 씻고 봐도 없다. 딱히 무엇을 할 것인가에 중심을 두지 않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앞뒤가 바뀐 설정에서 벽을 만났다. 꿈도 없고 도전심이나 모험심 없이 살아왔기에 색다른 일을 접하려고 해도 지레 겁이 먼저 앞을 가로막았다. 열정과 끼(?)만 가지고 겁 없이 덤벼들려 했지만 나이에 걸리고 경력이나 능력에 미치지 못했고 경제적인 뒷받침도 따라주지 못했다. 나의 한계 나의 능력에 대한 검증도 없이 시도하려 했던 무모함과 막연하고도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한 기대를 꿈으로 이어 보겠다는 어이없는 착각들은 나를 한층 더 무참하게 짓 이겨 놓았다. ‘늦었다고 생각 할 때가 가장 빠르다’라는 말이 나에겐 말짱 빈말이었다. 그렇지만 너무 늦었다는 핑계라도 대야 포기도 빠르고 자존심이 덜 상할 것 같았다.

예전에 느껴 보지 못했던 참담함에 고개는 자꾸만 아래로 꺾였다.

철이 들고 나이가 들면서 내 바람과 꿈은 항상 유동적이었지만 어느 싯점에 가서는 그래도 나에게 주어진 자리는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하고도 유치한 기대를 했었다. 그러나 시대와 나에게 주어진 환경은 내 꿈의 방향키를 번번이 돌려 버린 지배자였다.

철모를 때의 꿈은 말 그대로 현실과 동 떨어진 동화속의 얘기에 불과 했지만 그 바람이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소원이었다면 나이가 들고 삶에 부대끼다 보니 혀끝이 갈라지는 목마름으로 인한 희망사항은 다다를 수 없는 꿈에 머무르고 말았다.

중년에 품어 보는 꿈은 에너지를 아무리 충전 시켜도 구멍 숭숭 뚫린 성긴 가슴으로 받아들이기엔 틈새가 너무 벌어져 다 새어 버리고 쭉정이만 남아 있기 일쑤다.

꿈이 없는 사람은 미래도 희망도 없다고 했지만 틈새로 빠져 나가는 선 잠 잔 꿈일지언정 그래도 살아가는 힘이고 버팀목인가 하면 명분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불가항력에 의한 무력함도, 불가능한 무능도, 모두 이 꿈에 싸잡히면 이룰 수 있다는 희망으로 끊임없이 추구하게 된다. 

아무도 꿈을 본 사람은 없지만 있다고들 믿는다. 나 역시도 믿어왔고 앞으로도 믿을 것이다. 그러나 가랑이 찢어지도록 보폭은 널리지 않을 것이지만 되도록이면 벌새의 날개 짓 같이 부지런하고도 성의 있게 사는 것이 꿈을 이룰 것이라는 지극히 도덕적이고도 상식적인 테두리는 크게 벗어나고 싶진 않다.

내 나이 지천명을 꼴딱 넘겼다. 삶의 잔고가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예전의 그 달아나고 싶었던 꿈보다는 이젠 ‘재미있고 보람 있게 잘 살다 가는 것’이 남아있는 삶의 목표다.

보람 있게 잘 살려면 남아있는 한 가지 과제, 내 이름 석자가 박힌 수필집을 내어서 세인들에게 널리 이름을 알리는 것이다.

나의 이런 꿈같은 얘기를 남편은 한마디로 무질러 버렸다.

“사모님, 눈을 뜨시고 깨어나시죠.”

개꿈도 꿈이건만 눈을 뜨고도 꿈은 꿀 수 있다는 사실을 돈 없는 남편은 짐짓 외면했다.

끝없는 욕망은 차라리 꿈이 아니고 욕심에 가까울 수도 있지만 한번쯤, 꼭 한번쯤은 ‘나’ 아닌 ‘너(the others)’의 생을 살다 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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