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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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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 * .... 어중잽이의 꿈


BY 곤이네 2006-09-05

어중잽이의 꿈   

왜 다섯살 때 부터의 기억만 수록 되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할려고 버둥거려봤자 필름이 돌아가는 한계는 애초당시 시작은 거기서 부터이다


내가 일천구백 오십칠년 산 이니까 그때의 연도는 62 년도 가 맞는것 같다.
여섯살때 인가 보다. 당시의 부산은 대한의 제 2 도시 였건만 거대한 도시 구석 구석은
빈한함으로 슬픈 모습이 뇌리에 남아 있다.

경남 중학교 근처에 살던 나는 마땅히 노는 멍석이 없었던 고로 주로 대학병원 구내나
조금더 가서 체신청 뜰을 주무대로 놀았던것 같다

대학병원 앞길은 전차가 다녔고 막연히 어린 기억엔 전차의 존재가 그저 경이로워
한번씩 무임승차 하여 서면에 가면 큰 한양 나들이 한듯 신나 했다

전차 타고 가는 간도 큰 꼬마는 가는 동안 하는 사람 구경에 알수도 없는 포부를 가졌던
느낌이 지금도 남아있다.

체신청의 잘 커팅된 측백나무 등걸 위..

기어 올라가는 새끼 도마뱀의 꼬리를 십센티 나무자로 치면

정말로 꼬리를 자르고 어느새 날쌔게 내빼는 도마뱀을 보면서
신기하고 재밌어 훗날 나는 동물학자가 되어야지 하고 잠시 꿈을 꾸었던거 같다

여섯살때 ..

지금으로 치면 유치원이지..

기독교 사회관 이란 데를 다녔는데...
그때 처음 맛본 따끈한 우유는 귀족적 이었다

눈을 깜박 거리는 서양식 인형에 푹 빠지고

친절하고 이뿐 여선생에 매료 되고...
그때 어여쁜 여선생님의 클래식한 옷 매무새에 알게 모르게 나는 영향 받았지 싶으다.

하여 .. 그땐 또 선생님을 동경 한것 같다.


여덟 아홉 무렵엔 크레용과 파스텔로 그리는 그림그리기에 밤낮이 없었다
간혹 특선 가작 뭐 이런 상이라도 탔을라 치면 너무나 고무적이 되어 화가를 작정했었다

그러다가 열살이 되어 나는 원양호 라는 큰 배? (적어도 그땐 그렇게 커 보일수 없었다 ) 를
타고 여기 이곳 삼천포로 이사를 왔다.
그 배에 우리 이삿짐을 실었으니 나는 그배가 엄청난 규모로 보일수 밖에...

뱃전에 서서 시커먼 물살을 보면서 알수 없는 세계로 떠나는 것 같은 느낌은 지금도 전율이 온다.

몇년전에 타이타닉 영화를 보면서 왜 원양호가 생각 났는지 모를 일이다.
그만큼 어린날의 기억은 너무 깊이 각인돼 있음인가..

열두세살 시절엔 합창반에 소속 되어 동요에 신명들어 있었다.
그러면서 물론 유행가에도 심취 되어 훗날 가수가 함 되어 볼까 했던 꿈도 있었다

참으로 어린날 생각들이 시시각각 욕심이 많았다


사춘기 소녀적 열대여섯 되어선 말할수 없는 그 무슨 열망으로 가득차 오만거 때만거
다 하고 싶었는데 제일 기대 하였던건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던거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창작한 코메디를 점심 시간 이면 친구들에게 선 보이곤 했는데...
역시 웃어 주는 반응을 볼때 엄청난 희열을 갖었다

지금 개그우먼 맨 들이 관객의 반응에 울고 웃는걸 이해 할수 있겠다.
그러나 코미디의 청사진은 곧 걷어 들였다

또다른 욕망이 들끓었기에....


열아홉살 부턴 국문학과 고고학과 사설 탐정원 ..뭐 고딴 것에 신경을 돌렸던 것이다.
부지런히 변화 하는 드림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채로 어느것 하나 붙들지 못했다

스무살이 넘어 가면서갑자기 장사 하는것에 굉장한 매력을 느꼈다
공무원인 아버지께 공공연히 퇴직 하시면 아무 장사라도 벌여 보시라구..
그러면 책임 지고 운영 해드릴수 있다고 들떠 했었다

어중이 떠중이 생각들의 난무로 중심을 못잡는 젊은날을 보내고
결국 이 나이에 장사를 하고 있으니 이건 어떤게 씨가 되었을까?

그렇지만 가만히 정리 해보면 영화가 종합 예술의 응집체 이듯이 장사나 사업 이란건
모든 세상사 복합체의 결정문 인거 같기도 하다

무슨 사십구년의 영화 필름을 돌린것 같다.
이래 저래 어중잽이의 욕심은 아직도 미련은 남아 있다.

또 무슨 꿈이 마음속의 바다에 떠 다니는지 모른다

이왕지사 오스트레일리아 만큼의 거대한 섬 일지라도 한번 잡아 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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