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빨리 교회 가야지? 늦을 라...
어이구1 내가 이 소리를 듣기 싫어 결혼을 후딱 해 버린 여자다.
난 모태교인으로 늘 울엄마에게 주입을 당했다.
교회에 잘 나가야 시집도 잘가고. 돈도 잘 벌고. 잘먹고 잘 산다고 늘 그러셨다.
그런데 그 당시 나 어릴 적에는 월세방 단칸방에 내 남동생 셋에, 나와 울엄마를 합친 다섯식구는 남보기엔 불우이웃의 최고치였다.
엄마의 말씀대로 교회 나 갈때부터 굶지도 않고, 너른 내방에 안방을 낀 집에서 살아야 하며, 사시사철 옷을 사입는 부잣집이 되어야 하는데, 내가 열입곱이 될때까지 단칸방 사글세도 면치 못했다. 물론 지금도 전세방에서 사신다.
그러니 나는 중학교도 들어 갈지 말지 였다.
정작 입학해야 할 나는 신경도 못 미치고 있는데
우리가 나가는 교회전도사님이 그래도 여자라면 중학교는 졸업해야 한다고. 그래야 공장이든 어디든 취업을 해서 먹고 살 수가 있다시며 교회에서 입학금을 내 주는 바람에 엉겁결에 중학교 입학을 한다.
중학교 졸업을 하니 이젠 엄마가 그러신다.
얼굴도 못생기고, 칠칠맞고, 몸도 부실해서 허약한 데 고등학교는 나와야 시집이라도 온전하게 간다고 하시면서 나를 인문계 고등학교에 보내는 거다.
그 당시 집주소를 근거지로 해서 번데기 뺑뺑이 판돌이 돌리 듯이 추첨을 하여 근처 고등학교에 배정하니, 나는 생전 들어보지 못한 고등학교 이름듣고 거기가 어디에 있는 거여 했다.
나만 학교에 다니는 게 아니니, 남동생 셋을 포함하여 등록금내는 달이 되면 우리집 밥상은 그야말로 오로지 일품요리 김치에 밥이었다. 한참 잘 먹고 잘 커야 하는 성숙기에 학교 보내느라고 되레 굶는 판이 되었으니 밥달라는 말보다 학교에 안가면 안 돼? 물으면 숟가락이 날아오고, 밥그릇이 방바닥에 내 팽겨쳐지니 그 과격함이 실로 대단하셨다.
그런데 중학교 이학년 때, 담임이 교무실로 오라고 해서 가보니 이젠 등록금을 안내도 된단다. 무슨 말인가 어리버리하게 서있는 나에게 니네 엄마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우리들 등록금을 나라에서 책임지라고 편지를 해서 우리학교에 통고가 왔다. 전액면제를 해주라고 하더라!
과연 울엄마였다. 하긴 스물 입곱에 나 일곱살 먹고 아버지가 탄광에서 일하시다 사고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졸지에 애가 넷달린 과부가 되시니 당신 말로는 앞에 뵈는게 없었단다.
동네 이웃들은 새깽이두 모두 고아원에 보내버리고 그 당시 유복자였던 나의 막내남동생도 떼버리고 다시 시집가도 될 나이라고 그렇게 부추겨었단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고아원에 실려갔다.
그 고아원 원장이 고아원 애들을 내팽겨쳐놓고 어떤 여자랑 정분이 나서 도망가지 않았더라면 우리 세남매는 천상 고아원생이 될 뻔했다.
그 소식을 듣고 달려온 울 엄마는 나를 붙잡고 한시간을 우셨는데
난 영문을 모르고 엄마! 왜 우는 거야?
내가 오히려 엄마를 달랜 기억이 난다..
고아원에서 다시 돌아 온 울 엄마는
파출부며, 막일에 식당일이며. 안 해본 일이 없으시다.
그렇게 몸 녹아 없어지게 일을 하시는데도 집에 돌아오시면 책을 읽으셨다.
소설이나 여성 잡지 그런 거 말고. 철학서적에, 사회과학등 종교에 관한 것이다.
어쩌다가 읽으시다가 마음에 든 문구나 문장이 있으면 시멘트포 갱지를 잘 짤라서 공책을 만들어 꼼꼼하게 적어놓으시고, 밥 먹고 있는 나에게 읽어주고, 잠자고 있으면 깨워서 또 들어 보라고 하시니 난 귀찮아 죽겠다고 했다. 도무지 뭔 소린줄 모르니 더 갑갑 했다.
책 살 돈은 있었나 지금 생각 해보면 그 때 우리집 살림도 변변한 게 없었다.
고등학교 삼학년 되니 옆집이 이사가면서 버리고 간 흑백테레비를 방에 들여 놓으셨는데. 화면앞에 문짝이 달린 고물 테레비였다. 채널을 드륵 드륵 돌리면 화면이 세로로 확 줄어버려 사람얼굴인지 말대가리인지 구분이 안갔으나. 그래도 우리들 네남매에겐 이젠 우리집에도 테레비가 있다고 자랑하고 다녔다. 그렇게 구식 냉장고라고 주워서 온 날, 문 열면서 시원한 바람이 사는 곳이라고 기특하게 생각하는 막내동생과 얼음을 실컷 먹자 다짐도 했었다. 전화도 내가 스물 살때 겨우 들여놓고 썼는데.
그러고 보니 한 쪽 벽은 온통 책이 수북히 쌓여있고, 거기에 우리들 옷에 가방에 모두 두리뭉실 엉켜있으니 단칸방이 원래 이런가 했다.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 할 무렵 이상하게 엄마는 대학입시에 관한한 전혀 말씀이 없었다.
중학교는 공장에 취업을 하기 위해서 엉겁결에 다니고, 고등학교는 시집을 잘가야 한다고 보내시더니 대학은 무슨 명분도 이유도 토도 달지 않으셨다. 나는 내가 아마 대학에 들어갈 실력이 되지 못해서, 아니면 여자라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그 이후에 나의 남동생들도 모조리 대학에 보내지 않았다.어떤 말씀도 없었으니 서운한 감정이 조금은 있었지만 굳이 그런 걸 난 일부러 묻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을 하니 공부도 시험도 모두 나와는 상관이 없어지니 이젠 내세상이다하고 살았다.
사실 울 엄마는 무학이시다.
초등학교 입학을 하고 삼개월 다닌 게 유일한 학력이시다.
육이오가 터졌다고 오지 산골학교에도 휴교령이 떨어졌으니 밭으로 논으로 농사만 짓다가 교회에 다니라고 해서 교회 나가시다가 야학 선생님으로 오신 울 아버지를 만나신다.
그래서 교회에서 밤에 결혼 하셨다는데. 뭐가 그리 급햇는지 야밤에 결혼을 했냐고 물었더니 그 때는 그렇게 하라고 하면 해야 되는 거다 하신다.
세상을 잘 못 타고 난 덕에 우리들 네남매 키우시느라 삼십년 세월을 후다닥 놓치셨다.
언젠가 나는 엄마는 꿈이 뭐였어? 하고 여쭤보았다.
대답이 없으시다. 오랜 세월에 꿈도 흐지부지 잊어 버리셨나 했는데.
꿈은 무신 꿈?
초등학교 삼개월 다니다가 만 학교가 매일 꿈에서 다닌다.
이젠 졸업을 하고 싶은디...
이것도 꿈이 되냐?
어머니는 아직 졸업을 꿈꾸고 있으시다.
나의 어머니는 밤마다 꿈 속에서 학교를 가신다.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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