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은 수전증에 걸려 목소리도 수전증으로 바들바들 떨렸다. 처음엔 웃음이 나오려다가 안쓰러워지다가 귀 기울여 집중하다보니 목사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의미가 있어 내 가슴 판을 떨리게 했다.
교회 장으로 치룬 작은아버지 장례식은 지루한 장맛비가 그친 다음날이었다. 단양은 산과 강물로 둘려 있던 아름다운 소도시었다. 충주에 사시다가 단양으로 이사를 한 뒤부터 작은아버지는 고혈압으로 몇 년 동안 앓으셨고, 돌아가시기 3년 전부터는 대소변을 받아내고 치매까지 오셔서 정신이 고무줄처럼 제자리로 있다가도 늘어날 대로 늘어나면 징징 울다가 손뼉을 치며 웃으셨다가 하셨단다. 늘어났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가를 반복하다보니 고무줄이 삯아 끊어지던 날은 작은아버지가 태어난지 69해가 지난 며칠 전 여름이었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친정엄마와 동생부부와 단양으로 내려가면서 서로 눈물이 안나올 것 같다고 어떠해야 하냐고 걱정들을 했다. 내가 알고 있는 작은아버지는 무섭고 모질고 폭력적인 사람으로 머릿속에 못으로 박혀 있었다. 무엇보다도 큰 대 못을 박은 이유는 나의 엄마를 무시하고 없었던 남자관계를 있었던 것으로 만들어 내 앞에서 엄마를 바람둥이로 만든 것이었다. 호상이니까 울 것 까진 없다고 했다.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시긴 전에 세례를 받아서 천당에 가셨기 때문에 슬퍼하지 말고 기뻐해야한다고 엄마는 지난일은 잊으시고 권사님다운 말씀을 하셨다.
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한 시간은 노을이 깔리는 저녁 무렵이었다. 붉은 벽돌 병원은 언덕배기 자그마한 예배당처럼 단아하고 아늑해보였다. 언덕배기에서 내려다 본 단양은 장맛비로 인한 넘실대는 붉은 강물과 둥그런 초록 산이 몇 겹으로 겹쳐져서 정말 아름다웠다. 돌아가신 분을 생각해서 겉으론 감탄사를 흘리지 못했지만 그 자리에서 일분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작은 어머니는 우리를 보자마다 내 허리를 꽉 잡고 몸을 떨며 우셨다. 다른 사람은 놔두고 왜 내 허리를 잡으셨는지, 그리 모진 세월 나와 함께 살았던 날들이 아프고 미안하고, 어쩜 나에게 친딸 같은 정이 있었는지, 아마도 그랬나보다, 아마도 제일 비참하고 힘든 시절에 작은어머니와 나는 함께 살았다는 공동체적인 삶이 끈적거리는 정으로 남아 허리를 휘감게 되었나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다음해에 엄마는 나와 큰 동생을 동두천에 살고 있던 작은아버지댁 작은방에 보따리처럼 놔두고 가셨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의 삶은 그때부터 눈칫밥신세가 되어야했다. 작은아버진 그래도 핏줄이라고 나와 내 동생을 미워하거나 구박하지 않고 잘 대해 주셨다. 미군부대에서 일을 하셨던 작은아버지는 빵을 한 봉지씩 가지고 오셔서 나와 내 동생에게 실컷 먹게 해 주었고, 미워하는 기색이 없었지만 작은어머니는 작은 아버지가 바람피워서 낳아온 자식처럼 우리를 싫어하셨다. 목소리가 가늘다고 꼬집고, 다리가 길다고 발로 찼고, 제비꼬리가 있다고 머리카락을 잡아 당겼다. 설거지를 빠릿하게 못한다고 때렸고, 얼굴이 여우같이 생겼다고 뺨을 날렸다. 그런 작은 어머니가 내 허리를 잡고 소리를 내어 우셔서 한쪽 가슴은 알 수 있는 뭉클한 것이 올라 왔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엄마와 올케와 함께 신발을 벗고 작은아버지 영정사진이 놓인 곳으로 들어가 고개를 숙였다. 엄마는 엎드려 소리 내어 우신다. 왜 우시는 걸까…….세상에서 저런 나쁜 인간이 없다고 하셨던 시동생이라는 인간이 죽었는데 춤을 출 일이 아닌가…….천년만년 살 것처럼 나를 구박하더니 너 잘 죽었다, 해야 하지 않는가…….
동두천에서 미군부대 일을 하시던 시절 작은아버지는 후덕하시고 착하신 분이셨다. 그러나 그 시절 작은아버지 인생이 송두리째 뒤바껴야만 했던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그리하여 우리는 동두천을 벗어나 강원도 외갓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 나는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날개를 달고 높은 산을 순식간에 넘었다. 동두천 초등학교는 평지였고 가까웠는데도 신발에 쇳덩이를 매달고 있었지만 외갓집은 나를 구박하고 놀리고 미워하는 사람이 없어서 어깻죽지에 날개가 생겼다. 그 날개를 펄럭이며 가볍게 산을 넘어 학교를 다녔고, 과수원 길을 발끝으로 살짝 밀며 사뿐사뿐 거닐고, 냇물을 새가 되어 팔락팔락 건너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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