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도 늘 서늘하고 찌뿌둥한 북독일의 날씨가
왠일인지 일주일내내 30도를 오르내린다.
한여름용 원피스를 입으려고 옷장을 열어봤더니
죄다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묵은 오래된 것들이다.
날씨도 좋은데 요참에 원피스 하나 사지뭐!
이래서 어제 나는 시내로 갔다.
시내엔 많은 여자들이 끈달린 탑이나
조금더 과감하면 거기서 배꼽까지 드러낸 탑을 입었다.
벗은 어깨들과 벗은 종아리들이 길거리를 누빈다.
살색도 갖가지다.
희다못해 회색으로 보이는 흰색,
원래는 흰색이었으나 한바탕 바캉스를 다녀왔는지 갈색이 된 흰색,
원래 검은색이 바캉스 후에도 여전한 검은색,
아직 햇빛을 못본 노란색 등등.
나도 여자지만 예쁘게 차려입은 여자들을 보는 즐거움은 남자못지 않다.
가만있자. 나는 어제 뭘 입었더라?
그렇다. 술집에서 한 인도네시아 여인이 내게 준
형의상학적인 무늬가 프린트된 랩스커트(중고),
그리고 목뒤로 둘러 묶어 어깨가 드러난 노란 줄무늬 탑을 입었었지.
거기다 테이블보를 4등분한 골뱅이 무늬 파란색 머릿수건을 썼고.
내 어깨는 분류상으로 아직 햇빛을 못본 노란색축에 속했다.
시내 한복판 옷가게가 즐비한 패션의 거리에 도착하고보니
마침 거의 모든 옷가게들이 붉은 딱지를 붙여놓고 바겐세일에 들어갔다.
여기저기 눈도장만 찍다가 옷을 사고자 맘을 먹고 들어간 곳이
비교적 저렴한 H&M이다.
2층 여성의류코너에서 옷을 고르다 드디어 하나를 집었다.
꽃무늬가 프린트된 원피스였다.
길이는 무릎까지, 소매는 약간 부풀린 퍼프소매,
가슴은 깊게 파여서 허리까지 단추가 이어진,
남독일 맥주축제때 맥주나르는 여인들이 입는 그런 원피스.
그걸 살까 마음먹고 거울에 대고 이리보고 저리보고 하는데.
거울 속으로 한 여인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내 뒤에서 여름원피스를 고르고 있는 아랍 여인네였다.
아랍여인이 분명한 것이 그녀는 내것보다 두배는 큰 머릿수건으로
머리를 다 가리고 그 더운 여름에 얼굴과 손만 내놓고는
빠꼼한데 없이 온 몸을 다 가렸다.
남편과 내가 흔히 칭하는 펭귄의상이다.
(아랍여인들이 사시사철 입고다니는 검은색 코트와 긴 치마)
그 옆으로 유모차에 앉은 아기가 칭얼거리고 있는데
아기의 나이와 그녀의 얼굴로 짐작해 보건데
그녀는 이십대 중반이거나 후반이 분명했다.
그 여인이 만지작거리고 있는 원피스는 분홍색으로
아뿔싸 !
어깨에 끈달린 원피스다.
길이도 발목까지가 아니라 무릎까지 올 것 같다.
이 금지된 원피스를 그녀는 한참동안 서서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아기는 옆에서 칭얼거리는데.
‘그게 맘에 듭니까? 사시게요?
근데 그걸 어디서 입으시게요?’
이렇게 묻고싶었지만 속으로만 물어보았다.
나는 꽃무늬가 프린트된 원피스를 사들고 그 가게를 나왔으니
그 여인이 금지된 원피스를 샀는지 안샀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샀을 수도 있다.
사서 옷장에만 넣어놓고 남편이 출근한 후 살짝 꺼내서
집에서만 입고 있을 수도 있다.
자기도 여잔데, 게다가 그냥 보통 여자도 아니고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
막 피어오른 20대의 여자아닌가.
그런 여자가 온 거리의 여자들이 ‘날좀 보소’하고 예쁘게 꾸미고 노출하고
다니는데 자기라고 왜 예쁜 옷 입고싶지 않을까.
나는 머릿수건을 쓰고 온 몸을 빠꼼한데 없이 휘휘감고 다니는
아랍여인네들중 몇프로가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그러고 다니는지 묻고싶다.
스스로 그러고 싶어 그러고 다니는 여인들에게 내가 무슨 말을하랴.
이 민주주의국가에는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으니
멋대로 살구려 하고 내버려둘 것이다.
하지만 거역할 수 없는 종교적인 율법이나 전통, 가족들의 강요에 의해
그런 옷을 입는다면 이건 다른 문제다.
머릿수건을 안썼다고 오빠에게 구타당하는 여동생,
인종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려한다고 아빠에게 총맞아 죽는 딸이
아직도 보수적인 중동에선 낯선 일이 아니다.
나는 이슬람의 율법을 잘모른다.
하지만 종교건 율법이건 법률이건
한 개인의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주지 않고,
사회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존중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생각해보자.
여인들의 벗은 종아리와 팔과 머리카락들이 사회에 어떤 피해를 주었는지. 그걸보고 남자들의 성기가 제멋대로 발기하는 것은
여자들의 잘못이 아니지 않는가.
나는 때때로 생각한다.
진짜로 알라신이 여자들에게 머릿수건을 씌우고 온몸을 휘휘감는
펭귄코트를 입으라고 명령했을까 하고.
알라신을 못만나봤으니 알 수 없다.
하지만 알라신이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자애로운 평화의 신이라면
까짓 팔다리 드러난 원피스 입은 여자들 벌주기 보다는
그런 옷 입었다고 여동생과 딸과 아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오빠와 아빠들에게 벼락을 내렸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