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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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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이야기


BY 오월 2006-07-12

아주 어린날에 엄마손을잡고 남의집살이를 세번 갔었습니다.

처음 한번은 집하고 가까운 곳이여서 학교가는 친구들 모습이

보일때는 등에 아이를 업고 숨곤 했었지요.

그래도 집하고 가까운 곳이여서 엄마의 그리움을 몰랐습니다.

 

두번째집.

어린내가 떨어져 살기엔 꽤 먼거리.

엄마가 그 곳에 날 데려다주고 어느 모퉁이로 사라질때 마지막

보여진 분홍색 월남치마 자락은 아직도 가슴속에 그리움으로

아픔으로 켜켜히 남아있습니다.

 

그렇게 월남치마 자락이 사라지고 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 했어요.

그 모퉁이를 돌아서서 엄마도 많이 울었겠지요.

내가 엄마 눈물을 보진못했지만 많이 울었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지만

딸인내가 울었을때 엄마는 얼마나 많이 울었겠어요.엄만데....

 

세번째집.

서울이였습니다.

길을 잃을까 두려워 밖에 나가본적도 별로 없지만 정이 그리워서도

아니였고 애뜻한 사랑을 받아서도 아니였고 그냥 엄마가 보고싶어

울고울고 또,울었습니다.

고향산천을 붉게 물들이던 진달래꽃과 엄마의 분홍색 월남치마

영원히 가슴에 남아 아직도 그립고 그립습니다.

 

오빠가 군대에 가고 엄마는 오빠 목소리가 녹음된 테입을 틀고 울다

실어증에 걸려 병원신세를 지고 흙묻은 오빠 사복을 받고는 식음을

전폐하고 눈물만 흘렸었지요.

그만큼 내가 안보는 곳에서 엄마는 나를 위해 나도 보고싶어 그만큼

울었겠지요.

그런 생각을하면 내 설움보다 엄마가 가여워 눈물이 납니다.

 

그렇게 어린날이 가고 집에 돌아와 공장엘 다닐때.

하나 뿐인 신발은 못이 바닥을 뚫고나와 발바닥을 뚫곤 했지요.

긴 머리는 빨래 비누로 감아 찰랑찰랑이 아닌 치덕치덕이 되었고요.

늦은 시간까지 잔업을해야 조금더 받을수 있는 수당 때문에 열두시가

넘는 시간까지 잔업을하고 집에 돌아오면 얼음이 머리끝에 열리는

찬물로 몸을씻고 한자를 쓰곤했었지요.아직도 내 발바닥에는 못이

뚫고 들어갔던 자욱이 훈장처럼 남아 있지요.

 

아침에 일어나면 손등이 부어 펴지지 않았지만 그 시절 나 라는

존재는 없었습니다.

한달동안 일해서 받은 월급봉투는 동네 어귀에서 기다리던 엄마와

둘이서 연탄값,쌀값,부식비,빌린돈 그런것들을 갚으며 집에 도착하면

빈 봉투속에는 짤랑거리는 동전만 남곤했지요.

 

동생들이 줄줄이 상급학교에 진학하자 엄마와 내가 번돈으로는 살아

갈수가 없어서 작은 식당을 시작했어요.

걸죽한 농담과 세상을 아는 엄마와 농담한마디를 받아칠줄 모르던

쌩댕이 딸년은 허구헌날 싸우기 시작했어요.

왜,그런사람들과 그런 농담을 하느냐.

왜,그런사람들과 차를 마시려 가느냐.

왜,왜,왜.....

따지는 딸년과 입에 담지도 못하는 흉칙한 욕을 쏟아내든 엄마.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속상했던만큼 세상물정 모르는 딸년과 장사를

해야했던 엄마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죽는게 낫겠다 싶을만큼 식당일은 힘이들고 사람을 상대하는 일도

힘이들었습니다.

그래서 죽으려고 입에 댈줄도 모르는 진짜로(?)라는 술을 두병마시고

찻길에 뛰어든적도 있었답니다.

그곳에 그 힘든곳에 난 구세주같은 남편을만나 엄마를 그곳에 버려두고

도망을 쳤습니다.

멀리 아주멀리 도망을쳤습니다.

 

건설회사에 근무한 남편을따라 오지로 오지로 방방곡곡 안다녀 본곳이

없습니다.그렇게 엄마를 버려두고 도망을 쳤건만 내 엄마는 13번 이사

하는 곳마다 쫒아 다니며 쏟아준 그 정성을 어찌 이곳에 다 풀어낼수가

있겠습니까.엄마의 사랑이 그렇게 깊은줄 정말 몰랐습니다.

남편이 크게 벌여논 일들이 IMF 라는 복병을만나 죽음을 생각했을때

엄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일로 죽는다면 엄마는 골백번쯤 죽었을거다.\"

엄마는 분명 여장부였습니다.

 

누나의 힘들었던 어린날을 헛되지 않게 빛내주는 내 자랑스런 동생들.

고생시킨 어린날이 미안해 끝없이 주시는 엄마의 사랑.

고생시킨 딸년을 데려다 행복하게 해 주는 사위에게 결혼21년째 아직도

 김치와 밑반찬을 챙겨 주시는 엄마.

 

내 어린날이 힘겨웠지만 이만하면 행복한 삶이 아닐런지요.

나보다 더 철난 딸아이 때문에 가슴아프고 아홉살에 세상에 버려져

지금까지 병든몸으로 자식들을위해 기둥이되고 하늘이되고 그늘이

되어야 하는 늙은 엄마 때문에 가슴아픕니다.

내 엄마 인생에 마른손에 편히 다리뻗고 한번 쉬어보실 날들이 오려는지.

가족의 소중함을 너무나 뼈저리게 경험한 내 엄마는 그렇게 오늘도 다섯

쫄병을 거느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끔 아침에 눈을뜨고 잠시 정신을 차리기위해 앉아 있을때면 마른

바람이 덜커덩 거리며 창문을 두드립니다.

그럴때 아직도 서럽게 엄마가 그립습니다.

아직도 철나지 않은 사십중반에 이런기도를 올려봅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나도 내 엄마 만큼만 살게 해주소서....

 

\"만일 네가 불행했다면 나는 못살고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했던 엄마의 말 때문에 나는 게으른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나의 행복이 엄마의 행복이기 때문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