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3.1절 연휴에 일본으로 여행 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383

무모했던 나의 20대 (2)


BY 불토끼 2006-07-11

천신만고끝에 도착한
스톡홀름의 유스호스텔은 잠겨져 있었다.

하루종일 돌아다니며 몸은 지칠대로 지쳐있었고
배가 고파 거기서 한발짝도 움직이기가 싫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찾은 곳인데...

나는 여기를 놓치면
노숙을 노숙을 해야한다는 심정이 되어
이성을 잃고는 출입문을 마구 두들겼다.
만일 성수기가 끝나 장사를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서든 여길 비집고 들어가
하룻밤을 자야한다고 맘을 먹고.

한참을 두들기니 비찍 문을 열고
평상복차림의 종업원이 얼굴을 내민다.

‘뭔일이야?’ 

나는 내 처지를
말도 안되는 영어로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으며
제발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평상복 차림의 종업원이 밖으로 나오더니
출입문에 붙어진 종이쪼가리를 가리킨다.

내가 이성을 잃고 문을 두들기면서도
보지 못했던 종이쪼가리에는
이렇게 적혀져 있었다.

‘12시부터 17시까지 문을 닫습니다’

17시까진 꼭 30분이 남았으나
야박한 종업원은 나를 안으로 들이지 않는다.
30분 놀다 다시 오란다.

나는 한숨놓았다.
오냐, 30분이건 3시간이건
실컷 놀고오마.
오늘밤 잘 곳을 찾았으니.

정확히 17시에 다시 유스호스텔로 돌아가
나는 무사히 체크인을 마시고 내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은 6인용 도미토리다.
비수기라 그런지 침대 3곳만 손님이 사용하고
나머지는 비어있다.
그중 한곳에 내 짐을 풀고 나는 누웠다.
나는 누워서 생각했다.

‘배는 좀 고프더라도 괜찮아.
여행자에게 여행에 지친 한 몸
누울 수 있는 자리만 있다면.’

조금 있으려니 손님들이 들어온다.
3인의 손님중 두명은 미국에서 온 모녀.
나머지 하나는 크리스티나라고
내가 아직도 이름을 기억하는 독일 아가씨다.

스투트가르트에서 건축학을 전공하는 여대생인데
북유럽의 건축을 보러 여행을 다닌다는 것이다.

크리스티나의 제안으로
우리는 스톡홀름의 밤풍경을 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유스호스텔을 찾기 위해
하루종일을 돌아다닌게 무색해질 정도로
유스호스텔에서 시내까진 너무 가깝다.
걸어서 20분.

우리는 시내 수퍼에 가서
내일 먹을만한 빵과 음료수를 샀고
구시가를 걸으며 시내관광을 했다.

북쪽이라 그런지
 4시만되면 어둑신해지고
6시가 되니 한밤중이다.
구시가 군데군데 횟불을 밝힌 곳이 많다.

나는 크리스티나가 너무 고마웠다.
그녀 덕분에 환율이 괜찮은 곳에서 환전하여
집에 전화를 할 수 있었다.
엄마목소리를 듣고 나니 울적했던 마음이 풀려
나는 다시 부푼 여행자의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식당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시내관광을 하려고 나가려던 차,
유스호스텔에 도착한
3인의 한국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단 1박2일동안 외국에 있었건만
그 한국말이 어찌나 반갑던지...

유치원 선생님 하나,
군대를 마치고 복학을 앞둔 대학생 하나,
대학을 졸업하고 놀고있는 실업자 하나.
이들은 유럽여행중 만나
함께 북유럽으로 온 사람들이다.
두 달이상 여행을 한 베테랑 여행자들이었다.

나를 보더니 언제왔냔다.
어제왔다니까
여기서부터 여행을 시작하는 사람은 첨본다며
내일 북극권이자 유빙의 한계인
스웨덴과 핀란드 접경지역으로 가려고 하는데
함께갈려?
하고 묻는다.

나는 옳다구나 그들 틈에 끼어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것이 내  여행의 첫날이었다.

시작이 반이라고
나는 그 후로
핀란드의 북극권,
노르웨이의 피요르드.
뮌헨, 파리, 마드리드, 런던, 로마, 부다페스트 그리고
심지어 배를 타고 북아프리카까지 건너가
혼자 여행을 다녔지만
이 첫날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이 첫날을 고통스럽게 넘기면서
다시는 여행중에 바보같이 울지 않았다.
여행을 즐겼다.

울면서 여행을 시작했지만
내 여행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런던의 식당가를 누비며 일자리를 구하고 있었다.
돈을 모아
다시 동구권으로 여행갈 생각에 젖어.

지금 생각하면
참 무모했던 나의 20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