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처럼 집은 빈집이었다.
새벽부터 늦은 밤 동안, 바다에서 계실 부모님은 당연히 계시지 않았다.
동생들은 일주일 만에 만나는 동네 친구들을 찾아서 밖으로 나갔다.
소녀는 설거지를 시작으로 집안 청소를 시작했다.
시킨다면 하기 싫을 그 일이지만 알아서 하는 일이기에 하면서 정리되는 집을 보며 뿌듯한 마음이 들게 하는 그 일이다.
“선자야!”
맞붙어있는 이모네 집, 창가로 이종사촌 3째 언니, 영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녀는 밖에서 불리는 이름과 집에서 불리는 이름, 一人二名이었다.
영진은 소녀보다 4살 위였고 고등학생으로 늘씬한 키와 뚜렷한 이목구비로 알아주는 킹카.
집안 또한 동네에서 제일가는 부자였다.
이모부가 버스를 몇 대를 소유한 운수회사의 사장으로 근방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소녀는 이모네 식구들을 늘 경계했다.
없이 살던 지난 날, 소녀의 아버지는 이모부 밑에서 버스차장을 하며 온갖 수모를 겪어야 했고 엄마 또한 가정부 비슷한 대접을 받고 살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터였다.
삶의 여러 아픔 속에서 소녀의 부모는 일중독에 빠져들었고 지독히 돈에 대한 애착을 갖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소녀의 집은 날로 번창했다. 제법 많은 땅을 소유하고 은행에서 저축 상을 받을 정도로 알부자가 되었다.
반면 이모네 집은 몇 번의 사고와 부도를 맞으며 점차 몰락해가고 있었지만 워낙 소문 난 부자였기에 그런대로 버티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옛날의 습성과 사고를 갖고 있는 이모부와 이모는 소녀의 부모를 함부로 대했다. 그뿐 아니라,
제 자식들이 버젓이 있는데도 소녀와 그 동생들에게 심부름시키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소녀는 점점 반항적인 약은 고양이가 되었다.
“왜?!”
언니의 부름에 시큰둥한 소녀가 창가로 다가가서 대꾸했다.
“뭐해?”
“방 치워.”
“언니 심부름 좀 할래?”
“(역시나...) 내가 언니 심부름꾼이냐? 부르면 심부름이게? 직접해!”
“지지배, 점점 뺀질거려.”
“너는 안 뺀질 거리냐?”
“뭐, 너? 언니보고 너가 뭐야!”
“나 바쁘니까 부르지 마러!”
바르르 떨며 목소리 높이는 언니의 반응에 고소해진 소녀가 창문을 ‘쾅’소리 나게 닫아 버렸다.
집 안이 어느 정도 정리 되었을 때, 밖에서 사람의 발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문이 열리고 들어 온 것은 동생 진영과 처음 보는 낯선 남자애와 그외 알고 있던 동생의 친구들이 와르르 들어왔다. 그새 어디서 뒹굴며 놀았는지 온몸에는 흙과 마른 잎사귀 쪼가리로 범벅이었다.
시간 걸려 정리한 집안이 다시 지저분해지게 생겼으니 소녀는 그들의 등장이 여간 못마땅한 것이 아니었다.
“뭐야, 너희들?”
“응, 누나 목말라서 물 좀 마시려구.”
진영이가 누나의 발끈한 말투에도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거리며 말했다.
“물 마실 때가 그렇게 없어?”
“우리 집 가까이서 놀았단 말이야. 그런데 누나, 얘들이랑 우리 집에서 놀면 안돼?”
“뭐? 너 미쳤어? 누나 이제 방 다 치웠어. 다시 늘어놓으면 안 된단 말이야.”
“응. 그런데 누나, 얘가 바야바다.”
-그 당시 꼬맹이들에게 인기 있는 외화프로 중에 ‘바야바’가 있었다. 어린아이를 지켜주는 털복숭이가 ‘바야바~아!’하고 부르면 숲 어딘가에서 뛰어나와서 악당들을 물리쳐주는 힘 쎈 천하장사로 생긴 것은 그리 호감가지 않는 괴물(?)이었다.-
소녀의 동생들은 누나의 말은 칼처럼 잘 들었다. 그뿐 아니라 세상 누구보다 똑똑하고 강한 존재로 믿었다. 부모님의 세뇌교육 덕이 컸지만, 어쨌든 동생들은 제 친구들을 데려오면 부모님께 인사시키듯 꼬박 인사를 시키곤 했다.
묻지 않는 동생의 설명에 소녀는 ‘바야바’라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덥수룩한 머리와 평범함에서 조금 밑도는 얼굴의 이미지가 별명과 딱 들어맞았다. 별명의 내막은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알듯했다.
소녀는 동생의 친구를 보다가 떠오르는 다른 생각이 있었다.
‘뭐야, 그사이 이곳에 새로 온 사람들 많나 보네.’
물을 마시고 다시 왔을 때처럼 와르르르 몰려가는 동생과 그 친구들.
집은 다시 시계바늘의 초침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로 산중에 절간처럼 고요해졌다.
소녀는 다시 몇 시간 전에 봤던 멋진 남학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수돗가 쪽으로 난 창문으로 다가가, 그가 들어갔던 문을 지켜보았다.
집중한건 고작 몇 십 분이였지만 집안일을 하는 내내 힐끔거리던 그곳이었다.
소녀가 관심 갖고 있는 집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긴장해서 다리에 힘이 풀렸던 것과 달리 표현할 수 없는 상실감이 몰려들었다.
처음 본 낯선 남학생에게 그렇듯 정신이 쏠리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허전한고 답답하고 정리되지 않은 마음이 되어버린 소녀가 좀처럼 보지 않는 거실 한쪽 벽에 걸려있는 대형 거울 앞에 섰다.
파란 바탕에 커다랗고 화려한 꽃무늬가 예쁜, 무릎까지 내려오는 원피스, 좀 말랐다 싶은 외모, 또래에 비해 뒤지지 않는 키,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 앞모습 그런대로 괜찮다 싶다.
옆으로 살짝 돌았다...
소녀가 남들에게 꽤 듣는 이야기가 있다. 입만 벌리면 해대는 그 얘기들에 짜증스러울 정도였다. 소녀는 그 소리들이 정말 듣기 싫었다.
‘참 이쁘게 생겼다. 아까워서 어째?’
‘이목구비가 아주 미인이야, 에유, 쯧쯧쯧...’
다들 입만 벌리면 그 얘기가 그 얘기인 비슷한 지겨운 그 말들... 이쁘면 이쁜 거고 미인이면 미인거지 도대체 자기들이 뭐가 그리 아깝단 말인지. 소녀는 그 소리를 해 대는 사람들에게 쏘아대고 싶을 때가 많았다.
‘뭐가 그리 아까워요?’ 하고...
거울에 비친 마른듯한 앞모습과 달리 옆모습은 좀 통통하다 싶다. 가슴 아래로 풍성한 치마의 디자인과 긴 머리로 가려진 등 부분에서 소녀의 시선이 머물렀다. 칼로 도려내고 싶은 부분... 그 부분만 아니면 남들에게 아깝다는 소리는 안 들어도 될 텐데...
누구에게도 자신의 몸에 대해 하소연한 적 없는 소녀였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엄마에게 조차도.
속으로 삭히며 쌓인 것이 많은 소녀는 자신을 강하게 포장해야 했다.
어느 누구에게도 꿀리고 싶지 않았다. 누구의 뒤를 따라다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앞섰고 누구보다도 활발해야 했던 소녀다.
“야, 영미야. 정신 차려. 네 자존심에 누가 좋다고 따라 다닐 수 있겠어? 없잖아. 니가 언제부터 남자한테 관심 있었다고 난리야. 그런 것에 관심 없던 것이...웃긴다...너...”
소녀가 거울 속 자신을 향해서 말했다.
불과 20여분도 채 보지 못한 남학생에게 필이 꽂힌 자신에게 이제라도 정신 차리게 해주고 싶었다. 경험해보지 못한 마음 설렘을 가라앉히고 싶었다.
쉼 호흡을 몇 번 했다. 그러다보니 거울 앞에서 별짓 다하는 자신의 모습이 여간 유치한 것이 아니었다.
‘이상 한 짓은 여기까지. 누가 볼까 겁난다. 애들이 이러는 나를 봐봐. 난 좋아하는 사람 같은 건 안 키운다. 안 키워.’
소녀가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마음을 가다듬은 소녀는 부모님이 계실 바닷가로 가기 위해 집 밖을 나섰다.
부둣가로 가기 전에 부모님께 ‘쮸쮸바’라도 사갈 마음으로 구멍가게로 향했다.
턱!!!
햇볕이 강한 밖에서 어둑한 가게 안으로 급하게 들어서다 그만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치고 말았다.
“아야.”
“괜찮니?”
비명과 함께 소녀는 아픈 어깨를 한 손으로 잡고 자신만큼이나 조심성 없던 상대에게 짜증이 나서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내가 괜찮아 보여?’ 하고 따져 물을 심산으로 바라 본 곳에... 그리도 모습이 보고 싶어 애타게 창가를 서성이게 한 남학생이 서있었다. 혼자서 별 쇼를 다하며 겨우 마음 가라앉히게 만들었건만...
“!!! 네에?!... 아니...응....괜...괜찮아.”
내색하지 않으려 했건만 뜻대로 되지 않은 소녀는 바싹 긴장해서 대꾸했다. 남학생이 그런 소녀에게 하얀 치아를 들어내며 웃어 보이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콩당콩당...
힘차게 뛰는 심장, 이러다가 곧 심장이 터지는게 아냐, 괜한 걱정이 들만큼 심장이 세차게 벌렁거렸다. 혼이 빠진 소녀는 어떻게 ‘쮸쮸바’를 사고 그 많은 인파를 뚫고서 부모님을 찾아갔는지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부둣가는 변함없이 붐볐다. 주말이면 더 멀리서까지 싱싱한 생선을 사려고 몰려드는 손님들로 어느 때보다도 북새통이 되었다.
그 속에서 부모님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잘못하면 생선과 바닷물로 범벅인 그곳에서 넘어지기 십상이었다. 그리고 잘못하면 높은 부두 아래로 떨어질 위험성도 곳곳에 있었다.
그런 이유로 소녀의 부모는 소녀가 그곳에 나오는 것을 싫어했다.
고개만 빼면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건만, 먹이 먹기에 여념 없는 갈매기 때들의 행렬이 장관인 풍경을 볼 수 있건만, 북새통인 그곳에서 그런 여유를 즐기기란 쉽지 않았다.
어렵사리 찾은 소녀의 부모님.
아버지와 일부 몇 사람이 포장용 비닐을 깔고 잡아 올린 생선들을 선별하고 있었다.
소녀의 엄마는 생선을 고르는 틈틈이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과 흥정하기에 바빴다. 커다란 다라에 낙지며, 숭어, 커다란 가오리, 아나고, 쮸꾸미...등이 살아 헤엄치는 것이 보였다. 가구마다 싱싱한 젓 새우가 수북이 담겨서 쌓여있는 것도 보였다. 생선 비늘이 덕지덕지 붙은 몰골의 부모님의 모습이 소녀는 늘 안쓰러웠다.
“엄마!”
“딸 왔어? 근데 나오지 말라니까, 왜 나와. 엄마 봤으니까 아빠한테 인사하고 얼른 들어가.”
힘들텐데도 내색 않고 소녀의 엄마는 새하얀 치아를 들어내 보이며 반갑게 딸을 맞았다.
엄마와 인사를 마친 소녀는 엄마의 말대로 벌써 소주를 거나하게 마셔서 콧등이 뻘건 아버지께 인사하고 가져 간 ‘쮸쮸바’를 부모님과 일부들에게 돌렸다. 그 모습을 보신 주변의 어른들이 ‘집애 애들은 어째 그리 착해?’ 하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힘들 텐데도 자신의 별것 아닌 일에 얼굴이 환해지는 엄마의 모습에서 소녀는 잠시 행복했다.
생선 고르기를 도우려고 했지만 다들 만류하는 터라 어쩔 수 없이 소녀는 집으로 돌아왔다.
오후 5시가 넘으니 해가 지기 시작했다. 붉게 타오르던 노을빛이 점차 어둠속에 삭으러들었다.
나갔던 동생들이 들어왔다.
동생 진영은 혼자가 아니라 ‘바야바’라는 친구와 함께였다.
“누나, 나 오늘 얘랑 잘려구.”
진영이가 소녀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바야바’라는 친구도 함께 눈치를 살폈다. 필시 그 아이도 진영이에게서 누나의 더러운 성질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듯 했다.
“엄마한테 허락 받았어?”
“아니... 그러니까 누나가 도와줘.”
숫기 없는 진영이는 붙어있을 때보다 떨어져 지내는 일이 많았던 부모님에게 조차 어색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래서 소녀는 동생을 대변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고지식한 부모님은 자식들이 잠을 함부로 밖에서 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외할머니 댁이 아닌 이상, 곁에 붙어사는 이모네서 자는 것조차 하락치 않으시는 분들이었기에 동생의 부탁이 받아들여질리 만무 했다. 소녀는 동생의 부탁이 썩 내키지 않았다.
일주일 만에 만나 부모님께 그런 일로 혼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은 이유로.
“누나는 자신 없어. 생각해 봐라, 허락 해주시겠니? 그리고 ‘바야바’. 너도 집에서 허락 받기 어려울 것 아냐?”
소녀가 동생의 친구에게 시선을 돌리며 쌀쌀맞은 투로 말했다.
“누나...나는 괜찮은데. 아무대서 자도 엄마한테 안 혼나.”
아무대서 자도 안 혼난다니...그렇게 마음 좋은 부모 밑에서 크는 아이도 있구나, 잠시 부럽던 소녀는 자신의 집에서는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되는 참으로 어렵고도 힘든 일이라는 것을 설명해야만 했다.
“너희 집은 어떨지 몰라도...”
사고가 자신들과 조금은 틀린 것 같은 아이에게 자신의 집에 대한 설명을 하려고 할 때였다.
“철수야! 여기 있니?”
현관문 유리창 앞으로 사람의 형체가 비췄다. 문 밖 소리에 ‘바야바’라는 소년이 얼른 문 앞으로 다가가서 문을 열었다.
“응, 형. 왜?”
“또 보네.”
또 보네...또 보네... 거짓말 같은 일이, 꿈같은 일이 현실로 다가왔다. 생김새도 미소도 멋진 남자가 소녀의 바로 눈앞에서 웃으며 말을 건넸다.
‘겨우겨우 가라 앉혀구만, 왜 이러니 정말!’
기쁨(?)과 난해함이 한데 어우러진 어정쩡한 소녀의 기분.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하지만 소녀가 누구던가. 자존심 덩어리, 거울 앞에서 생쑈까지 벌이며 겨우 잠재운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소녀가 냉정하다 싶을 정도로 아무렇지 않은 듯 시선을 피했다.
“여기 사는 애구나. 나 좀 들어가도 되니?”
남학생의 물음에, ‘됐거든, 들어오지 마!!!’ 하려 했다. 그런데 고작 나온 말이라고는,
“...맘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