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5월이고 1일이었다.
노동절이고 공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잘 여문 햇빛이 비춰주었고 날씨도 온화했다.
방만구씨와 나는 1년동안 창고에서 곰삭은 자전거를 꺼내
기름을 치고 바람을 넣고 먼지를 털어냈다.
그리고 한참을 궁리하던 끝에
작년 10월 돌버섯을 한광주리나 땄던 숲으로 놀러 가기로 했다.
잠에서 깨어난 뱀을 찾아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숲까지는 자전거타고 1시간 남짓 걸리는데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자전거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꽤된다.
숲에 도착한 우리는 자전거를 세워두고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지만
뱀은 커녕 지렁이 한 마리도 구경하지 못했다.
숲을 헤매고 다니다 우리가 지금껏 한번도 보지 못했던 오솔길을 만나게 되었다.
너비 2,3미터 정도로 나무를 베어 내서 그런지
어두컴컴한 숲속에 비하면 햇빛이 잘 들었고
녹색 카페트를 깔아논 것 처럼 푸릇푸릇한 들풀들이 막 올라와
뛰어가서 막 뒹굴고 싶은 그런 오솔길.
“이런 곳에 노루가 나타나거든. 봄이라 운이 좋으면 새끼 노루를 볼 수도 있고.”
새끼 노루를 볼 수 있다는 방만구씨의 말에 솔깃하여 고개를 드는 순간...
아! 거짓말같이
50미터 전방에 큰 개만한 노루 한 마리가 서 있었다.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미동도 없이.
거룩한 모습이었다.
그간 뭔가 부스럭거리는 걸 보지 못했으므로
어쩌면 노루는 거기 한참을 서서
두런거리며 다가오는 우리를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노루를 본 우리가 더 놀라 걸음을 멈추고 대화를 중단했었는데.
노루는 주기적으로 움직이던 물체가 갑자기 움직임을 중단한 것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몸을 돌려 숲속으로 쏜살같이 뛰어가버렸다.
우리는 노루본 놀란 가슴을 가라도 앉힐 겸
혹시 다시 노루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
나무 뒤에 몸을 숨긴채 꼼짝 않고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 보았다.
“노루는 늘 다니는 길로만 다니거든.
특히 아침 저녁으로 먹이를 찾을 때.
그래서 노루가 다니던 길에 고속도로를 닦아도
노루는 습관처럼 그 고속도로가 된 길을 건너려다 많이들 치어 죽곤 하지.
그러니 놈이 어쩌면 여길 다시 나타날지 몰라.
이것 봐. 바람이 우리쪽으로 불잖아?
놈이 우리 냄새를 못맡을 거니까 우리한테 유리해.”
방만구씨는 제법 전문가처럼 목소리를 착 낮추어 말했다.
노루를 기다리다 기다리다
이 기다리는 행위가 하찮게 느껴질 무렵,
우연히 이 들풀이 피어오른 오솔길 끝에 눈길을 툭 던졌었는데...
찰나의 순간이었다.
갑자기 내 몸이 위로 붕 떠오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가슴이 확 터질 것 같은 기분이 느껴진 것은.
내가 이 자리, 나무 뒤에 앉아 노루를 기다리는 것이 아닌
공중에 떠올라 이 숲과 숲의 일부가 된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느껴졌다.
알맞게 따스한 햇빛, 길게 펼쳐진 오솔길,
양옆으로 나무들이 빽빽한 숲을 보고 있자니
노루는 온데 간데 없이 잊어버리고
예전에 잠깐 알고 지냈던 아는 언니의 말이 떠올랐다.
그때 내 나이 20대 중반이었고
언니는 나보다 열 살에서 열다섯 정도 많았으니
지금의 내 나이정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계절도 당시 햇빛의 강도로 가늠해 보건데 5월초 였을 가능성이 높다.
우린 홍대앞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었고,
나는 홍대 지하철역에서 내려
카페 골목으로 걸어 가는 동안의 날씨가 너무 좋아
언니를 만나자 마자 날씨 얘기를 꺼냈다.
“언니, 제가 여기 오면서 무슨 생각 했는지 아세요?
오늘 날씨가 너무 좋아서 말이죠.
아기가 태어나기에 정말 좋은 날이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내가 그때 20대 중반의 건강한 가임기 여성이어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런데 언니의 대답이 의외였다.
“넌 그렇게 생각했니?
난 오늘 날씨가 너무 좋아서 죽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땐 나이도 별로 먹지 않은 언니가 참 염세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바로 이 숲속 오솔길에서 떠올랐던 언니의 말은 전혀 염세적이지 않았다.
아름답다고까지 느껴졌다.
이 아름답게 펼쳐진 저 오솔길의 끝이 이 세상의 끝이라면...
우리가 지금 여기서 일어나 저 오솔길의 끝까지 걸어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오솔길의 끝에서 다시 시작되는
다음 세상에 태어난다면...
여러 가지 생각이 겹친다.
냉장고에 넣어둔 볶은 호박,
무단 결근,
오늘 아침에 한국에 주문한 물건,
월드컵 티켓 사려고 송금한 돈,
오늘 저녁 윈네서 보드게임 하려고 한 약속...
이 모든 것들이 지금 이 순간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된다.
그저 지금까지 놀멘놀멘 살아왔던 것이 다행스러웠고,
남에게 못할 짓 안하고 살아왔던 게 다행스러웠고,
은행에 잔고가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도 다행스럽다.
슬픔은 죽은 자의 것이 아니라
살아 남은 자의 몫이라고 그랬던가.
이런 날 죽는다는 건 슬픔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 아닐까.
이렇게 건강하고 젊은 모습으로,
이렇게 햇볕 좋은 날,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아름답게 이 세상의 끝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건.
날씨가 너무 좋아
그 날 5월 1일,
죽음에 대해 한번 생각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