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를 알게 된건 초등 2학년 때부터였다.
이후로 내리 고등학교까지 쭉 한반에서 아웅다웅거리며 지냈으니
좋은 날도 보고 흐린 날도 보고
몇날 몇일씩 잘 지내다가는 한번씩 털이개로 먼지털듯이 토닥거릴 때도 있었다.
동네는 약간 달랐지만 워낙 좁은 바닥에 눙쳐 산지라
그 집안의 구성원도 소상히 알 뿐 아니라
숟가락 몽댕이 갯수까지는 몰라도 숟가락으로 밥은 많이 얻어먹었다.
걔네 가족이 걔만 남겨놓고(왠일인지) 여름에 휴가를 가면 나를 포함해
초대된 몇몇이 걔네 집에 가서 몇날이고 합숙을 하다가 서로 지쳐 입싸움을
열나게 할라치면 휴가에서 돌아오는 날이 되 있곤 하였다. 또,
오래 눌러 살던 걔네 집에서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갈 적에는 우리 집에 와서
몇일씩 시험공부를 같이 하곤 하던 서로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사이였지만
왠일인지 서로 물과 기름같은 개성의 차이를 확인하며
물감섞이듯 화악 섞일 수는 없음을 은연 중에 알아가는 사이이기도 하였다.
거기에는 서로를 잘 아는, 같은 연배인 부모님들 간에 있을 수 있는
(대부분 자식에 관한) 묘하고도 은근한 경쟁의식도 작용했으리라 본다.
아이들 나이와 아들 딸 구성이 똑 같았다.
딸 셋에 막내 아들 하나...
일과 집 밖에는 담을 쌓으시고 직장일이 항상 우선이던 답답하리만치
융통성이 없으시고 오직 한길만 바라보던 우리 아버지에 비하면
일과 집 말고도 옆도 살피고 한량 기질이 있으시던 그 애 아버지는
울 동네에서 그 당시 자가용차를 가장 먼저 살 만큼 흐름에 민감하시고
여행을 좋아하시고 어쩔 땐 딴짓을 해서 좁은 동네에서 아내의 속을 아프게
하기도 할 만큼 사는데 즐기시는 분이었다. 그 때는 흉거리가 되었지만
남의 말은 사흘가면 잘 간다 하지 않던가 말이다.
아들 많은 집의 고명딸이자 막내딸로 나와 응석꾸러기로 자란 울엄마,
없는 집안에 시집와 가세 일으켜 보겠다고 아기인 나와 동생을 남에게 맡기고
한때 양장점까지 경영하는 수완을 발휘하시다가 결국 집안에 들어앉으셨는데
남은 솜씨로 아이들과 엄마 옷만을 만들거나 헌옷을 고칠 뿐 더이상 수완을
발휘하는 쪽으로는 미련없이 날개를 접으신 듯 하였다. 가끔씩 탄식조로 그 때
기성복쪽으로 밀고 나갔었으면 어땠을까 하시는 말을 들은 적은 있는 것 같다.
이북에서 월남한 피난민이었던 걔네 엄마, 열살도 채 안되었던 어린 나이에
팬티 속에 여비를 감추고 공포에 떨며 홀홀단신(?) 피난했던 사뭇쳤던 체험을
어린 우리들에게 침 튀기며 설파하시던 만큼 생활력도 강하시던 분이었다. 요즘은
지천에 널린 것이고 또 환경호르몬이다 해서 오히려 안쓰는 그야말로 각양각색깔
플라스틱 찬기며, 교복자율화로 인해 필요해진 아이들 옷이며 이런 것을 도매로
떼어다 가게가 별로 없는 외진 우리동네 엄마들에게 모조리 전파했던 것이다.
남들 보기에는 우리는 참 비슷한 가족 구성원을 지녔던 관계로 사는 것도 쉽게 비교
가 되지 않을까 싶다. 남의 일에 별 관심이 없는 나인데도 이 집일 만큼은 소상히 기억해
내는 것이 신기하다. 아마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