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만구씨의 술버릇
방만구씨는 우리 남편이다. 남편(독일사람)이 동양학을 전공하는 바람에 1년간 중국 북경대에서 교환학생으로 학문을 닦은 적이 있었는데 착실하고 선생님 말씀 잘 듣는 우리 남편에게 중국어 선생님이 친히 지어준 중국이름이 방만구이다.
방 만 구. 많고 많은 세련된 이름 가운데 선생님은 하필이면 이런 소똥냄새나는 이름을 지어주셨담. 하긴 사람은 자기 이름을
닮아간다고 자꾸 부르다 보니 우리 남편이 방만구처럼 생긴 것 같기도 하다. 혈색좋고 둥그스름한 얼굴에 넉넉한 배둘레. 이런
외모에 ‘김세철’같은 뾰족한 이름이 어울리기나 하겠는가!
어쨌든 총각 방만구씨는 동양학에 관심이 많은 청년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양여자에게도 관심이 많은 청년이었다. 그 동양학이란게 돈
잘버는 학문은 아니지만 동양여성과 결혼할 경우 그 집안 어른들에게 환대받는 학문이라는 건 확실하다. 우리 방만구씨가 결혼을
앞두고 한국에 왔을 적, 집안 최고 어른이신 80이 넘으신 큰아버지를 뵈러 갔을 때 그의 전공이 확실히 빛을 발했으니까.
우리 큰아버지는 80이 넘은 노인으로 4남6녀중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65세인 우리 아버지와는 터울이 많아 아버지는 형을
아버님처럼 모신다. 큰아버지는 자식들 출가시킨 후 버스도 안들어가는 깡시골에 기와집을 지으시고 혼자 사시면서 논어, 맹자 등
어렸을 때 배운 학문을 복습하시고 감농사도 지으신다. 집안에 경사가 있으면, 예를 들어 명절, 결혼, 재혼시 큰아버지를 찾아
뵙고 인사드리는 것이 불문율인지라 외국인과 결혼한 나라고 예외일 리 없었다.
신혼여행 후 큰아버지를 방문했더니 마침 안방에서 종이를 펼쳐놓고 가는 붓으로 한자를 쓰고 계셨다. 노인네는 오랜만에 보는
조카딸을 화들짝 좋아서 반기시거나, 조카사위라고 인사드리러 온 생전 첨보는 외국인을 정답게 맞아주지 않으신다. 그저...
‘어험’
할 뿐이다. 그러시더니 지금까지 한자연습 하시느라 앞에 두었던 먹, 붓, 벼루, 종이 등이 올려진 개나리 소반을 옆으로 치우시며 못마땅한 표정으로다가 한다는 말씀이.
‘서양것들은 못배워먹은 것들이라 부모 자식간에도 야 야 한다더라.
어잉-- 쯧쯧쯧’
기대하지 못한 반응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서양것과 결혼한 내앞에서 그렇게 말씀하실게 뭐람. 성미급한 나, 말을 마구 하는
나, 욱하는 성질이 있는 나는 그 소리에 그만 심기가 불편해져서 큰아버지께 ‘찍’소리 라도 하려고 하는데...
옆에서 조용히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게... 오비이락이라, 까마귀 날자 배떨어진다는군,
이건 또... 계란유골이라, 계란에도 뼈가 있단 말이군,
에또... 격세지감이라, 세상이 많이 변해 딴세상이란 말이군.
음... 할아버지의 글씨가 전체적으로 일필휘지로다!‘
혼자 썰렁하게 앉아있다 심심해진 방만구씨가 개나리 소반위에 얹힌 한문이 적힌 종이를 읽는 소리였다. 논어 맹자를 복습하고 계신
우리 큰아버지가 그런 4자성어를 적었을 리 없겠지만 학문이 딸리는 나로서는 당시 방만구씨가 읽어내려간 글이 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때의 분위기를 재현하느라 대충 내가 아는 4자성어로 적었으니 양해하기 바란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방만구씨는 못배워먹은 ‘서양것’에서 ‘학문이 깊은 청년’으로 탈바꿈하여 큰아버지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그뿐인가. 우리 경주이씨 밀직공파 집안에서는 학문이 깊은 외국청년이 집안에 장가왔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번져 우리 부모님의
어깨까지 덩달아 으쓱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좋은 시절의 이야기는 딱 여기까지다.
세월이 흘러 방만구씨는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원을 졸업하고 깊은 학문과는 전혀 상관없는 코딱지만한 중국 무역회사에 입사를
했다. 어디를 가나 명석한 학생, 탐구심이 깊은 청년으로 칭찬받았지만 이 코딱지만한 중국무역회사에선 자신이 연마한 학문이 더
이상 소용이 없게 된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곤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술만 마시면 자신의 더 이상 소용없어진 학문을 내게 열강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나는 감동했었다.
‘이 남자, 독일에서 중국학문을 이끌어갈 독보적인 사람이야!
이 남자에게서 늘 배우려는 겸허한 자세로 임하자.‘
하지만 겸허한 자세는 1년이 못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점점 귀에 딱지가 박히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대들기까지. 말이 나와서
말이지 방만구씨는 평소에는 별로 말이 없다가 술만 마시면 고정 레파토리로다가 ‘마오쩌뚱의 문화혁명, 마오쩌뚱의 천일장정’ 등을
얘기해 대는 것이었다. 그러다 드디어 정말이지 들어주는 것이 고역이다 싶어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그거 다 아는 얘기거든. 벌써 몇 번째야. 이제 고만 좀 할래?’
요지는 이거지만 상처받을까봐 좋게 좋게 돌려서 얘기했더니,
‘나 10분만 더 얘기하면 끝나니깐 쫌만 기다려.’
상처받기는 커녕 계속 얘기하는 것이었다. 이럴 땐 삼십육계가 수다 싶어 걸음을 빨리했다. 뛰다시피 걸어가는 나를 따라오며
계속해서 ‘마오쩌뚱의 문화혁명’을 읊어대는 이 끈질긴 남자. 정말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이러면서 우리 방만구씨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박정희와 마오쩌뚱을 비교하는 글을 한번 써보면 어떨까?’
이런다.
더 이상 대꾸할 말을 잃은 나. 이런 소릴 들으면 나도 별수 없는 아줌마가 다 됐는지 이렇게 대꾸한다.
‘그런건 써서 뭐하게. 돈도 안되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