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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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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와 딸


BY 일상 속에서 2006-05-15

 

친정집 정원에서 (모델이 꿈인 딸이랍니다.)


딸아이가 피아노 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것이 초등학교 입학식 날인 3월 2일부터였으니 이제 1년하고도 2개월이 넘어가고 있다.

그동안 연주회가 2번 있었다.

첫 번째 연주회 때, 제법 두 손가락을 건반에 올려놓고 연주하는 폼이 지 엄마보다 났다는 생각에 뿌듯했던 것 같다.


2번째 연주회는 보름 전쯤에 있었다. 친정엄마가 사주신 예쁜 드레스와 매직드라이로 말아 올린 긴 머리까지, 모양새는 학원에서 제일이었던 나의 딸.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식쟁이처럼 악보에 음표들이 콩나물로 보이는, 그래서 그것들만 보면 다들 떼어내어 삶아서 양념 넣고 팍팍 제대로 무쳐 먹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는 난...말 그대로 피아노엔 일자무식이다.


그런 뛰어난 무식을 자랑하는 내가 보기에도 두 번째 연주회 때 내 딸이 치던 피아노 연주가 또래의 아이들보다 쉬워 보였다.


“어머니, 아영이 연주 너무 잘했죠?”


딸아이를 향해서 환하게 웃는 내게 원장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처음보다야 좋아졌지만,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좀 쉬운 것을 쳤네요. 아영이가 잘 따라가지 못하나 봐요?”

“ 아뇨, 이제 1년 조금 넘게 배워서 저 정도면 잘 한 거예요. 다들 아영이보다 빠르게 시작해서 그렇죠. 아이를 가르칠 때 재미를 주는 아이가 있는데 아영이 같은 경우가 그래요. 발전하는 모습이 참 대견스러워요.”


원장선생님은 어설프게 실망을 숨기고 있는 나의 마음을 꿰뚫고 위로해 주었다.


연주회를 앞두고 아영이는 멜로디언을 불어가며 열심히 연습을 했다. 가끔 피아노 얘기를 꺼내기도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으니 체념한 듯, 힘껏 입으로 불어가며 멜로디언 건반을 두들겨댔다.


연습하고 나면 배가 아프단다. 왜 안 그럴까? 나도 몇 번 불어보니 뱃살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던데...

첫번째 연주회때...뒤에서 아들도 찰칵...

집은 코딱지만하고 갖고 있는 돈도 없고... 피아노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냥저냥 살았건만. 두 번째 연주회를 보고 온 날부터 딸에게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머릿속 가득 중고피아노라도 뒤져보자는 생각이 가득했다.


생각하면 실행으로 옮기고 마는 나... 그래서 일요일인 어제 딸을 데리고 피아노 구경 한번 다녀오자며 자전거 뒤에 태우고 페달을 밟았다.


“엄마, 절대로 사러가는 거 아냐. 구경하러 가는 거지.”

“응, 알아.”


나의 다짐 앞에 딸은 신나서 대답했다.


그리고 도착한 중고피아노 매장...


아... 뭐가 그리도 비싼 건지. 좀 괜찮다 싶은 것은 3백만원이 넘었다. 눈을 질끈 감고 사장에게 말했다.


“아줌마, 싸고 좋은 것이 어떤 건가요?”

“싸고 좋은 거요?... 얼마 선을 말씀하시는 건지...”

“90만원정도?”


나는 정말 뱃장이 두둑한 건지, 나사가 살짝 빠져 버린 것인지... 자존심이 상할수록 더욱 당당해지고 만다. 나의 당당함 앞에 당황하는 것은 오히려 사장이었다.


“여기 이것이 대우에서 나온 건데 음질도 좋고 디자인도 좋구요... 현찰가로 125만원이거든요... 90만원대라면 지하에 아직 손질은 안됐지만 곧 수리해서 보내 드릴 수 있는 것도 있어요.”

“매장에 있는 것은 그보다 품질이 떨어진다는 것 아니겠어요? 좋은 거야 저기 1500만원이라고 써진 것이 좋네요. 돈이 없어서 그렇죠. 이것저것 신경 쓰지 않고 사려고 했다면 전자피아노라도 샀을 거예요. 소리도 중요하고 치면서 느끼는 감각을 생각해서 중고라도 그냥 피아노가 났겠다 싶어서 이렇게 온 거구요.”


장사하는 장사꾼이 별의 별 사람을 상대 안했을까? 나의 말을 듣던 여자는 맞다고 장단을 맞춰 주더니 매장 안에 올라오지 않았지만 지하에 있는 것들 중에도 좋은 것이 많다면서 자꾸 아래로 내려가자고 했다.

두번째 연주회, 사진발 좀 받죠? ^^


대우에서 피아노가 나오는지도 몰랐다. 기껏 알고 있는 거라곤, 삼익, 영창이 다 건만, 들어도 모르겠는 알아준다는 회사의 제품까지... 눈요기는 잘했다.


딸은 엄마는 안중에도 없이 매장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피아노를 치고 다녔다. 저가의 제품 중에서 상처도 별로 없이 소리가 괜찮은 것은 125만원의 대우에서 나온 거였다.


남편의 통장에, 일할 때 써야 한다는 돈이 좀 있으니 어떡하던 사고를 칠 심산으로 가 본 그곳, 칼을 뽑았으니 무라도 썰어야 한다는 심산으로 해결을 봐야만 했다. 125만원짜리를 90만원에 달라니 여자가 다른 곳으로 가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밑져야 본 전, 난 알았다며 다른 곳을 둘려 보겠다고 매장을 나오며 명함을 하나 받아 들었다. 길 맞은편에 또 하나의 중고 매장이 있었다.


그곳의 제품들은 더 가관이었다. 가격도 터무니없었고. 앞집을 들러서 왔다는 말에 괜찮은 제품이 있다며 80만원까지 해주겠다는 말을 했다.


칠도 다 베껴지고 건반도 둘쑥날쑥, 피아노 줄에 먼지들하며... 길거리에서 버려진 것을 주워 온 듯 했다. 나의 구겨진 인상을 보던 주인이 말했다.


“이것 이틀이면 완전히 새것처럼 해드려요. 난 지금껏 살면서 80만원에 누굴 줘 본 적이 없네요. 앞집에 들렸다가 오셨다니 해 드리는 거지.”

“... 이것 봐서는 마술을 부리지 않고는 제가 원하는 상태는 되지 않겠는데요. 소리나 제대로 나겠어요?”

“수리하고 난 것 보시면 아시죠.”

“그럼, 언제 수리가 되나요? 그때 와서 보고 결정하죠.”


어쨌든 가격은 80만원으로 맞춰 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딸은 신이 났다.


“엄마, 하얀색 피아노가 참 이뻤는데 난 그래도 엄마가 골라 주는 것이 좋아. 히히히...”


피아노를 사서 들고 가는 것도 아니건만 아영이의 마음속엔 어느새 피아노 한 대가 떡하니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먼저 들렸던 피아노 매장으로 전화를 해서 앞의 중고 매장에 들렀는데 가격이 80만원짜리 피아노를 보고 왔다고 말했다. 장사의 치열한 경쟁심을 유발하고 싶은 얉으막한 심정으로...


그것이 맞아 떨어졌다. 전화를 두어 번 통화 했을 때 여자는 97만원까지 가격을 내렸지만 피아노를 옮기는 인건비까지 운운하며 더 이상 내릴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럼 안되겠다고 내 쪽에서 전화를 끊었다.


5분도 안돼서 여자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남편이 그렇게 주라고 했다며 90만원에 흥정을 하자는 거다. 아...힘들다...

 

두번째 연주회 때, 폼만은 제대로~


어쨌든 피아노는 다음날 오기로 했다. 아기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거실에 놓기로 했다. 그래서 14년 된 문짝도 떨어진 주니어 장롱(허접한 것들 넣어 두는 용도)를 내버리려고 그 속에 있던 물건들을 정리하고 치우는 대대적인 일을 치러야 했다.


그동안 틈틈이 사고를 쳐서 살림을 장만했던 나였지만 90만원의 큰돈을 건들여야 하니 남편에게 미리 이실직고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핸드폰을 두드렸다. 한참 만에 남편이 받았다.


“응.”

“바뻐?”

“응, 왜?”

“나. 피아노 샀거든. 중고 피아노. 그래서 장롱도 치우고 일이 커졌네.”

“환장하겠네. 지금 때가 어느 땐데 피아노냐? 그것도 남이 쓰던 것을. 다음에 하자. 나 지금 천장 속에서 일한다.”

“그럼, 취소하란 말이야?”

“그래야지.”

“... 천장 속이라고?...”

“응.”

“알았어.”


아...나도 환장하겠다. 별의 별 짓을 다해서 피아노 가격을 내렸건만...은은하고 청량한 음색이 귓가에 맴도는 그 피아노... 신나서 짐 나르는 일을 돕는 딸의 모습...


나는 다시 배짱 좋게 피아노 매장으로 전화를 했다.


“미안해요. 피아노 얘기 없던 거로 해야겠네요.”

“왜요?”

“그럴 사정이 생겼어요.”


여자의 물음에,


‘우리 남편이 먼지 가득한 천장 속에서 용접 일을 한다네요? 10만원하는 인건비 줄이겠다고 그 독한 가스와 먼지를 마셔가면서 말이죠. 그 말에 90만원 버리려고 했던 것이 미친 짓이란 것을 알았단 말이죠.’


하고 대답할 순 없었다.


그 여자는 분명 굵은 소금을 한 바가지 냅다 뿌렸을지도 모른다. 딸의 실망하는 모습을... 가슴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남편이 저녁에 얼굴이 벌게서 들어왔다. 술 취해 들어오는 것이 하루이틀 아니니 대수로울 것도 없지만 좀 다른 모습이었다. 술 때문에 달아 오른 것이 아니었으니...


“얼굴이 후끈 거리고 미치겠다. 용접만하면 얼굴이 익어 버리는 것 같아.”

“내가 마사지 해줄게.”


냉장고 속에 넣어 두었던 차가운 마스크 팩을 얼굴에 붙여주는 나에게 남편은 피아노는 조금 더 있다가 사자고 말했다. 나는 낮에 별 쑈를 다해서 피아노 가격을 내린 얘기를 굳이 하지 않았다.


피아노를 들이지도 않았건만 이상하게도 그 무거운 피아노를 혼자 힘으로 이층까지 들어 올린 것처럼 힘이 들었고 맥이 빠져 버렸다. 그래서 잠에 쉬이 빠져 들었는지 모르겠다.


아... 중고 피아노는 날아갔다... 하지만...몇 시간 만에 난 돈 90만원은 벌어 놓았다. 쓰지 않았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