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8시가 조금 안돼서 전화가 울렸다. 엄마였다. 평소 같았으면 내가 전화를 드렸을 테지만 심상치 않은 요즘 심기로 전화를 드린다면 걱정하실 테니, 참았다.
어린이날을 앞두고 보내 주신 돈으로 잘 먹고 잘 놀다가 왔다고 말씀 드려야 도리인 것을... 이론은 빠삭한데 실전에 약한 나다.
“뭐해?”
“응, TV봤지. 엄마는?”
“이제 밥 먹고 치웠어. 오늘 뭐 했어?”
“가까운 절에 갔다가 왔어.”
“기분이 안 좋구만... 목소리 들으니...”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안 좋긴... 엄만 나도 이제 30대 중반 고개를 확 꺾었어. 매일 기고만장해서 떠들면 보기 안 좋지.”
“젠장할... 딸 년 목소리 듣고 기운 좀 내려고 했더니...”
(엄마에게 있어서 그래도 이 못난 딸이 기운을 주는 사람이라니... 그동안 늘 그렇게 기운 빼낼 일만 벌이며 살았는데도...)
“엄만 무슨 일인데... 내 목소리 듣고 기운 내려고 했다면 기운 빠진 일이 있었다는 거잖아.”
“오늘 고추 몇 개 심었게?”
“글쎄... 아빠의 욕심을 봐서는 상상이 안 되지. 몇 개 심었어?”
(성의 없는 나의 대답이었다. 실은... 몇 개 심었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900개 심었다. 니 에비는 늙어도 어쩌면 그렇게 일 욕심이 많은지 모르겠다.”
“그러게... 아빠의 욕심을 누가 말려.”
“경호(아직 결혼하지 않은 막내 동생. 2째네 집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는 휴일 인데 안 내려 갔어? 간다고 했는데.”
“내일 내려온다더라. 그 년 데리고...”
“그년?... 아... 희수... 푸하하하... 엄마는 아무튼... 그새 희수가 그 년이 된거야? 엄마도 어쩔 수 없는 시어머니네.”
경호는 나와 7살 터울 지는 남동생이다. 누나인 내게만큼은 꼬박꼬박 경어를 쓰는 막내... 그만큼 늘 엄한 누나였던 나다. 조만간에 결혼할 여자를 데리고 인사를 온다고 했기에, 어떤 아가씨일까 궁금해 하고 있다.
막내가 그 아가씨랑 사귄지는 2년 째 접어든단다. 막내 동생은 자기 힘으로 영어를 더 배워보겠다고 중국에 있는 외국어 대학도 다닐 정도로 열성적이다. 하지만 부모님 눈에는 허송세월 보내고 있는 못난 놈이다.
그런 녀석이 중국에서 돌아 온지 3개월이 되도록 실업자로 있었다. 희수라는 사귀던 아가씨와 헤어졌을 때도 그때였다. 양쪽 집에 사귀는 것을 허락 받고 서로의 집까지 왕래 했다는데... 나 역시 동생이 실업자가 돼서 버림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 했었다.
부모님 생각이야 오죽했을까...
동생이 직장을 구하기 전에 내게 한 말이 있었다. 다시 그 아가씨랑 만나고 있다고... 자신이 고집센 아가씨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 헤어지자고 했고 그동안 연락이 와도 받지 않았다고 부연설명을 했지만... 사실, 나 역시 반신반의다.
동생이 그 아가씨와 토요일 날 내려간다니, 엄마는 불편한 심기를 여지없이 드러내며 야물딱지게 생겼다고 칭찬하던 그 아가씨를 ‘그년’이라 호칭했다.
그 아가씨, 내려가면 눈칫밥 꽤나 먹게 생겼으니... 안됐다.
“시어머니는 무슨... 결혼식장까지 들어가서도 파토네 어쩌네 하는 판국에... 내려오긴 뭣 하러 내려와. ”
“엄마, 높은 곳에 있을 때 예쁘게 봐주지. 엄마, 남의 입장에서 잘 생각하잖아. 내 딸이다... 내 딸이 이런 상황이면... 그렇게 생각하면 안쓰럽다며. 연애시절 싸우고 헤어지는 거야 love story 지.”
“몰러. 이 년아, 기운 내. 보아하니 오늘 잘 보낸 것 같지도 않구먼... 애들 아무것도 안 해줬냐?”
“안 해주신, 보내준 돈으로 자장면도 사주고 피자도 사줬는걸.”
“사주긴 뭘 사줘... 끊자.”
미치고 팔딱 뛸 일이다. 정말로 사줬는데... 미친 척하고 자장면 먹고 싶다는 아들 놈 곱빼기로 시켜주고, 피자 먹겠다는 딸 년 피자라지 한판 시켜줬는데... 안 믿으신다.
간밤에 술이 떡이 돼서 가게로 자기를 데리러 오라고 전화한 남편의 전화를
‘매일 허리 아프다며. 보일러 펑펑 떼는 가게 방에서 그냥 자.’ 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던 나는 속이 상해서 간밤에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했다.
<남편은 분명히, 부처님 오신 날, 남한산성에 함께 가자고, 그 날은 어린이 날이기도 하니, 다른 날도 아니고 꼭 시간을 내야지 하고 호언장담을 했었다. 그런데 또 미안하다는 말로 다음을 기약했다.
그래서 난 아이들을 혼자 데리고 3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절로 다녀왔다. 하지만 불상조차 마음속에 담지 못하고 향만 피우고 내려왔다. 갈 때는 택시를 타고 갔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운동을 하자며 아이들에게 걷자고 했다. 집에 가서 다른 곳에 가기에는 어중간한 시간이었으니... 가서 마땅히 할 것도 없었으니...
그래서 걷자고 했다.
시골 풍경 비슷한 그곳에 텃밭들이 군데군데 있었다. 치커리, 상추, 양배추, 배추, 파, 땅콩, 옥수수, 냉이 꽃, 클로버... 그것들을 설명해주며 한발 한발 집을 향해 걸었다. 갈증이 날 아이들에게 음료수 하나씩 사서 물렸다.
중간 쯤 왔는데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절에 갔어?”
“응. 가는 길이야. 걸어서.”
“어느 절? 가까운 곳, 거기?”
“응.”
“저녁에 돈까스 먹을래?”
“자기는 좋겠다. 아버지랍시고 어쩌다 돈까스 사주면 할 도리 다 한 거니 말이야. 매일 ‘미안해,’ ‘다음에... 다음엔...’ 그러면 끝이니, 아버지 할 만 하겠어. 그 놈의 돈까스 이제 나도 지겹다. 열심히 살아도 부모 대접 받네 못 받네 하는 판에..,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냐?”
“괜히 전화 했네...”
“괜히 했으면 그냥 끊어.”
내 마지막 말을 끝으로 난 핸드폰을 꺼버렸었다. 낮에 있었던 일들로, 아니 그 동안 잘 참았던 나의 마음이 지탱할 힘을 잃었다. 남편이 맨 정신에 일찍 들어왔지만 나는 아들 방에 처박혀서 눈도 안 마주치지 않았다. 그럴 때 엄마가 전화를 하셨다.
내가 밥상을 차려주지 않으니 남편이 혼자 쟁반에 밥을 비벼서 먹을 때, 나는 먹고 죽은 귀신 때깔도 좋다고 아들에게 자장면, 딸에게는 피자를 사준 터였다.>
남편이 나의 눈치를 살폈다. 아들 방에서 쭈구리고 자는 나를 일으켜 아들 침대에 눕혔다. 말하기도 귀찮아서 가만있었다. 이불을 덮어줬지만 그냥 확~ 걷어 차버렸다.
술 먹고 늦게 들어오는 것, 직원 관리차원에서 그럴 수 있겠지.. 했다.
돈 약속 안 지키는 것, 거래처에서 안 주니 도둑질을 하지 않고서야 어쩔 수 없겠지... 했다.
아버지의 도리는 할 줄 모르며 대접은 받겠다는 남편, 보고 듣고 배운 것이 없어서 그러려니 했다.
늦게도 나가고 남의 초상집에 일을 멈추고도 가는 남편, 집에 뭔 때가 되면 세상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 돼서 도무지 짬을 낼 수가 없다고 해도...팔자가 그러려니... 너도 안됐다... 했었다. 그렇게...
이래서 저래서 참고 참았는데... 나의 마음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만땅의 드럼통이 됐고 터지기 직전에 풍선이 되었다.
남편이 내게 혼 날 때가 된 것 같다. 맞아야 정신 차리는 건 애들만이 아닌 듯하다.
오늘 터트릴까... 내일 터트릴까... 통 밥을 굴리고 있는 중이다. 주변에 조만간에 좀 시끄러울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