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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고 싶은 바보의 변


BY 은하수 2006-05-04

<쇼생크 탈출>이란 영화를 보신 적이 있는지?

잘나가는 은행원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십몇년을 감옥에서 썩다가

두껍고도 높은 암벽을 뚫고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된다는 내용.

모르는 분은 아마 없으리라.

지금도 눈앞에 환히 떠오르는 장면이 둘 있다.

 

죄수인 주인공이 음악을 감옥 운동장에 대고 소리높여 틀어놓고

흐뭇한 미소를 띠며 머리를 뒤로 젖힌채 감상하는 장면이 있다.

<피가로의 결혼> 오페라에 나오는 두 여성이 부르는 아리아인데...

모두가 그 자리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노래를 듣는 장면.

모두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각자마다 달랐을 것이다.

그 순간만큼은 자유로운 사고의 나래를 펴지 않았을까?

 

주인공은 그 일로 일주일 독방신세를 지게 되지만 그럼에도

꺾을 수 없었던 <자유의지>가 그를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게 하였다.

 

다른 한 장면은 하수구를 통해서 드디어 탈출에 성공한 주인공이

마침 장대비가 쏟아지는 하늘을 향해 두 팔 벌려 비를 맞는 장면이겠지.

자유를 얻은 기쁨을 더이상 표현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또 한사람 탈출에 성공(?)한 사람은 주인공의 흑인동료였다.

출감시기를 정하는 심사관의 질문에 매번 자신은 교화를 충분히 받아서

출감할 때가 되었다고 확신에 찬, 애원에 가까운 대답을 하나 번번히 낙방을 한다.

나중에는 지친 나머지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 달관의 자세로 대한다.

자신은 아직도 교화를 더 받아야 하고 그래서 출감해서는 안된다고 대답한다.

그 얘기에 드디어 출감 허가를 받게 되는데.

 

교도소장의 탐욕으로 영원히 감옥에 갇혀있어야 할 운명에 처해 있음을 깨달은

주인공이 목숨을 걸고 감행한 탈옥.

흑인동료의 포기에 가까운 순응(달관)의 자세로 얻어진 출옥.

 

어느 것이 피를 덜 흘리고 덜 수고로울까?

어느 누가 되었든간에 무엇이라도 시도해 볼 수는 있겠지만

성공의 확률이 많은 쪽으로

자신의 처지에 맞는 쪽으로 해 보아야겠지.

다 처한 입장이 다른 것이므로.

각자의 얼굴과 지문이 다르듯이.

 

두 사람은 왜 그토록 간절히 자유를 갈망했을까?

갇혀있는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는 자유가

행복에 필요한 최우선의 조건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본능처럼 움직인다.

 

화창한 봄날

문득 치미는 갑갑증을 잠시라도 잊고 싶어

적어 본다.

 

사람인 이상 환경의 영향을 안 받을 수는 없는 것 같다.

좋은 조건의 환경이면

그만큼 손쉽게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쁜 조건의 환경이라면

불행이 더 가까이 손짓할 것 같다.

이런 조건, 저런 조건을 극복하고

행복과 불행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위대하다. 강인하다.

 

조건이 나쁘다면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행복이란 필요조건이 아니라 충분조건이 되어야할 것이다.

행복하기 위해서 더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더 부지런해야 할 것이다.

더 감사해야 할 것이다.

 

조건이 좋다면 역시 이를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행복이 온전하게 유지될 것이다.

 

행복도 불행도 노력해야 하는 거라면

힘이 들겠지만

역시 어느정도 노력해야 하고

먼 목표를 정하기 보다는

가까운 목표를 정하고

작은 일상에 충실하는 것이

행복에 다가가는 지름길이 아닐까 싶다.

 

큰 행복은 없단다.

작은 행복만 있을 뿐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