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동...’
“누구세요?...”
“택배입니다. 홍 영미씨 댁인가요?”
전 날 전화 한 통화에 다음 날 바로 도착하게 만들다니... ‘울 엄마 성질 급한 것은 알아 줘야해...’ 물건을 받아든 나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다. 집에 남은 콩 좀 있으면 뻥튀기로 튀겨서 먹게 보내 달라고 했는데, 내가 받아든 종이 박스는 부탁했던 조금의 콩 무게 치고는 묵직했다.
식탁 위에 올려 진 박스는 어찌나 야무지게 테이프로 칭칭 감겼는지 도저히 뜯을 수가 없어서 칼까지 동원해야만 했다. 겨우 열린 박스 안,
3,000이란 가격표까지 붙어있는 다시 멸치 한 봉지와 반말은 족히 되는 노란 콩, 세되 불량의 찹쌀, 투명 위생봉지에 야무지게 담겨있는 냉이가 있었다. 아무래도 집에 있는 것 중에 보낼 수 있는 것은 모두 싸 보낸 듯 했다.
“직장 다니느라 쉴 새도 없을 텐데... 언제 냉이를 이만큼 캤을까?...”
봉지를 뜯고 들여다 본 냉이는 손질이 깨끗이 되어 있어서 따로 닦을 필요도 없어 보였다. 서울 한복판에서 봄의 향기가 물씬 나게 하는 그것으로 저녁상에 올려놓기로 했다.
부글부글 끓는 물에 냉이를 데치기 위해 집어넣는데 은빛의 무언가가 냉이 속에서 함께 따라 나오는 거였다.
“뭐야... 손질해서 본 낸 줄 알았더니...웬 쓰레기.”
꼬깃꼬깃 접힌 쿠킹호일이 아주 볼품없게 접혀 있었다. 냉이를 끓는 물에 얼른 데쳐 내야 했기에 나는 그것을 싱크대 한쪽에 아무렇게나 놓아두고 하던 일을 마무리 졌다.
그리고,
싱크대 한쪽에 아무렇게나 놓여 진 그것을 집어 들었다. 아차하면 쓰레기 통으로 직행했을 은박지 쪼가리가 아무래도 이상했다. 티끌하나 없이 깨끗하게 손질 된 곳에 왜 이것이 들어가 있을까. 설마...
설마하는 마음으로 나는 은박지를 조심스럽게 열어 보았다. 그리고 보이는 초록색... 만 원짜리 지폐였다. 5만원...
가슴이 뭉클했다.
작년 김장때 김치를 비롯해 말린 나물들과 무와 깻잎 장아찌, 감자, 고구마,40kg 쌀 5자루, 찹쌀, 도토리가루, 검정콩, 들기름...등등 헤아리기조차 힘겨울 많은 주식과 부식거리들로 한차 가득 담아 주신 나의 부모님.
시골에 사시는 부모님은 남들 보기에 부러울 것 하나 없이 사시는 분들이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전원주택에 잔디가 예뿐 정원까지...
젊은 시절부터 어부로 고기잡이를 하셨던 부모님은 30년이 넘도록 배를 타셨다. 평택 항이 들어서면서 그만 두시기 전까지는. 열심히 사시는 두 분 때문에 2남 1녀인 우리 남매 역시 부지런함이 몸에 베어버렸다. 동네 분들은 우리 3남매를 가리켜 효성스럽고 우애 깊다고 칭찬하셨다. 그것에 부모님은 힘을 얻으시는 듯 했다.
부모님을 그렇게 자랑스럽게 만들던 자식 중에 한명이었던 나였는데 한 남자를 알고부터 부모님 가슴에 비수를 꽂은 나쁜 딸이 되어 버렸다. 너무나 갖은 것 없는 남자... 지금의 남편과 나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막말로 보따리 싸서 도망을 쳐서 살림을 차렸다. 열심히 살면 돈이란 당연히 모일 거란 자신감이 있었다. 그때의 짧은 생각으로 십여년을 괴로워해야 했다. 난생처음 당해보는 모진 세월 속에서 난 많은 인생을 배웠기에 지금은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난 자신들의 계획대로 꾸준히 발전하는 동생들과 달리 힘겹게 살고 있다. 그런 딸 때문에 엄마는 아빠 몰래 틈틈이 수중에 있는 돈들을 조금씩 내어 주셨다. 밑 빠진 독처럼 채워지지 않는 딸의 살림에 IMF가 터지기 전까지는 큰 목돈까지 챙겨주셨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시련 많은 나의 삶 속에서 엄마의 그 피 같은 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만 갔다.
IMF란 참으로 지독한 병마 같았다. 그렇게 든든할 거라고 믿었던 친정 부모님까지 흔든 것을 보면... 전처럼 여유롭게 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부모님 두 분이 조금씩 아껴 사시면 지금처럼 공장 같은 곳에 나가지 않아도 될텐데...
농부가 아니신 아빠는 동네 이곳저곳 쓸모없이 놀고 있는 땅을 주인의 허락을 받아 개간해서 자식들의 먹을거리를 손수 가꾸신다. 그리고 남의 논이나 밭을 돌아다니시며 쌀이나 감자, 고구마 같은 것을 얻어 놓으신다. 그리고 모두 자식에게 나눠 주신다. 그 중에서도 제일 애물단지인 못난 딸을 동생들 알게 모르게 더 챙겨 주신다.
편히 쉬실 나이에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겠다고... 자식에게 손 내밀며 사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그렇게 지금껏 쉬지 않으신다.
챙겨 주시는 먹을거리들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되고 몸둘바를 모를 정도로 죄송한데... 냉이 속에 들어 있던 꼬깃꼬깃 접힌 5만원 앞에서 나는 더욱 불효녀가 되었다. 코끝이 찡해졌다. 어떠한 값진 금은보화와도 감히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값진 그 돈을 들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고 있을때 마침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하지만 난 역시 못난 딸이다.
점심시간을 틈타서 전화를 거신 엄마의,
“ 택배 갔니? ”
“ 응 받았어. ”
“ 뭐 찾은 것 없어? ”
“ 있어. 엄마는 뭐야? 주려면 10만원이나 채워서 주던가. 왜 5만원만 보냈어? 찝찝하게... ”
“ 이런 썩을 년... 있는 것이 그것 밖에 없었다. ”
나의 배짱 좋은 푸념에 역시나 엄마는 아주 익숙한 욕으로 마무리를 지으셨다. 난 엄마의 욕이 참 듣기 좋다. 아직 정정하다는 거니까. 그래서 일부러 더 욕을 들으려 애(?)를 쓰고 있다. 엄마의 욕에 난 항상 박장대소로 답한다.
“ 푸하하하... 엄마, 잘 먹을게. 아빈아빠랑 아빈이랑 유나랑 냉이무침 얼마나 좋아 하는데... 엄마 잘 먹을게... 엄마 내가 무진장 사랑하는 거 알지? 알라뷰... 에휴...영어 잘못 썼다가 혀 깨물었다. 엄마 파이팅!!! ”
“ 그려, 너도 파이팅.”
친구같이 편한 엄마다. 지금까지도 동생들 앞에 엄한 아빠 역시 딸인 내 앞에서 만큼은 여전히 꼼짝 못하신다.
가끔 전화로,
“ 아빠는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
“ 허허허... 딸이지...”
“ 그렇지? 나도 아빠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거 알지? ”
“ 그럼... 아범은 일 잘 되고? ”
“ 그럼. 아빠 기둘려 봐봐...지금 세상 돈 모두 쓸어 모으고 있으니까. 그럼 내가 아빠 비행기 한 대 사줄게. ”
“ 제발 그래라... ”
하는 식의 대화.
두 분을 너무 사랑하는데... 살아생전에 꼭 좋은 곳에 여행도 보내 들이고 맛난 것도 사들이고 싶은데... 아직은 마음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철부지 딸처럼 아직도 어리광 부리는 일 밖에 없다. 36살이 되도록 아직 이러고 산다는 것을 남들이 알면 푼수라고 하겠지. 나와 남편은 나의 부모님처럼 우리 자식들에게 이런 사랑을 베풀수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