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감기에 걸려서 학교에 보내지 못한 적이 있다. 처방전을 갖고 들른 약국. 갓난아기 때부터 다닌 약국이니 벌써 8년째 다니는 단골이 되었다.
“ 유나, 많이 컸구나. 참 좋을 때다. 저때는 아무런 고민도 없고, 해주는 대로 있기만 하면 되니까...”
약사의 친근한 말이었다.
“ 어린 나이라고 고민이 없을까요? 지 딴에는 모르는 것이 많아서 고민이고 처음 당해보는 일들로 머리 아플 테고... 친구들과의 변덕스런 사이로 신경 쓰일 텐데요. ”
“ 그렇긴 하지만... 어른들은 더 복잡하잖아요. ”
나 역시 어릴 때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수 없이 많다. 기운이 없어서 내 몸조차 닦기 힘든데도 딸의 몸을 씻어 줘야 할 때, 끼니때마다 해 돼야 하는 밥, 다달이 어김없이 다가오는 온갖 공과금에 나가야 하는 돈들, 아이들과의 시달림, 남편과의 신경전, 친정을 비롯한 시댁의 일들, 친분을 생각해서 신경 써야 하는 주변 사람들의 일들... 정말 어른이란 것이 돼서 세상을 보니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것이 없다.
당장 세상이 끝날 것 같은 일들은 왜 이리 자주 내게 다가오는 것인지 절망 적일 때가 많다. 그럴 때면 너무 생각이 많아서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14년이란 결혼 생활에 얻어 진 것이 있다면 세상을 조금은 느긋하게 보게 됐다는것. 어쩌면 포기에 가까운 것인지 모르겠다.
신혼 초,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워대는 나에게 주인아주머니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젊으니까 싸울 힘이 있는 거여. 나이 들어봐. 만사 귀찮아서, 그래~ 너 그렇게 살아봐라. 니 맘대로 혀... 하게된다니께. 내 주변 보니까 하나 둘씩 사별하는 사람들도 생겨나더라. 살아생전에는 웬수같은 놈, 죽일 놈 살릴 놈, 욕을 징그럽게 해 대더니 지금은 그때가 그립다고 하더구먼. 그런 것 보면 자식들이고 뭐고 다 헛거여. 금이야 옥이야 키워놔 봐야 지들 잘나서 컸다고 하지 고마워하는 줄이나 알어? 그런 것 보면 부부 밖에 없는 겨. 그러니께 신랑한테 잘혀.”
10년도 훨씬 더 된 옛 일이 요즘서 새록새록 머릿속에서 떠오르곤 한다. 그 당시에는 그 말에 머릿속으로 들어오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그분이 어리석게 느껴졌었는데...
큰 녀석이 이제 6학년인데 예전에 먹혀들었던 나의 잔소리가 물의에 둥둥 뜬 기름처럼 녀석에게 스며들지 않는 다는 것이 느껴진다.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어 하고 엄마를 졸졸 따라다니며 귀찮을 정도로 조잘 되던 것이 지금은 대화 좀 하고 싶어서 말을 건네면 뚱한 표정으로 할 얘기가 별로 없단다. 시장 따라가서 오뎅이라도 얻어먹으려고 죽어라고 따라 다니던 것이 이제 짐 좀 들어 달라고 함께 가자고 해도 바쁘다는 핑계까지 되는 것을 보면... 모든 면에서 점점 엄마의 품을 벗어나려 하는 녀석과 그래서 요즘 다툼이 많다. ‘남편이 속 썩이면 싸움이라도 하지, 자식이 속 썩여봐. 죽이지도 못하고 살리지도 못하고...’ 어른들 말 틀린 것 하나 없다더니... 삶 속에서 직접 내가 부딪히고 살아보니까 그 말들이 이제서 이해가 된다.
그러고 보니 점점 남편과의 싸움 횟수는 주는 것 같다. 반대로 아이들과 부딪힘이 오히려 더 많은 것 같다. 그렇다고 남편이 전보다 술을 덜 먹는 다거나 돈을 더 많이 벌어 주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남편이 술에 취해 골아 떨어진 모습이나 새벽같이 일어나서 밥 한 술 뜨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안쓰럽다는 생각이 든다. 해보겠다고 하는 일, 그럼에도 실속이 없으니 자신이야 오죽 답답할까...하는 마음이 든다.
욕심이 많으면 실망이 크다고 했다. 내가 생각해도 난 욕심이 참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자식에 대한 욕심도 남편에 대한 욕심도 모두 버리고 싶은데 현실은 나를 마음먹은 대로 두려고 하지 않는다. 현실은 어쩜 핑계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르겠지만...